말없이 버텨온 어머니의 시간
"언제부터 어깨 힘줄이 끊어진 거야, 엄마?"
"에이, 몇 달 됐어. 지금은 그래도 괜찮아졌어."
"말을 하지, 내가 몰랐잖아."
"너 걱정할까 봐 그랬지. 너무 걱정 마."
어머니의 어깨 힘줄이 끊어져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전해 들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요 며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머니께 털어놓곤 했고, 가정의 자잘한 일상도 자주 얘기드렸다.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는, 본인에게 닥친 큰 통증을 나에게 말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고 계셨던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그 시절, 입학식 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학교에 들어가셨다. 입학식을 마치고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사를 나눈 뒤, 나는 홀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학창시절,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갔던 날은 그 하루가 마지막이었다.
이런 우리 집의 가정 환경이, 어릴 땐 조금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집 어머니들은 친구들이 오면 간식도 챙겨주고 살림도 도맡아 하셨는데, 우리 집은 어머니가 전업주부를 하실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 인형에 눈알 붙이는 부업을 집에서 하셨고, 아버지와 함께 봉천동까지 내려가 치킨집을 하시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나를 혼자 집에 두기 불안하셨는지 직접 운영하시던 치킨집에 데려가 서빙을 맡기셨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집에 부모님이 거의 안 계시다 보니 자의든 타의든 나는 일찍부터 혼자 서는 법을 배웠고, 홀로 있는 시간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어머니가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다니시는 병원의 조리사 일은 벌써 30년이 넘었다.
하루는 새벽 3시 반에 출근하고, 다음날은 오전 9시에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는, 살인적인 노동 강도. 그런 일을 지금의 내 나이부터 시작하셔서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버텨오신 것이다.
어렸을 땐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어머니의 짐을 덜어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도 그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하셨다. 새벽부터 용달차를 몰고 나가 일당 3만~4만 원을 받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저층 빌라에 짐을 나르시며 생계를 꾸리셨다. IMF 직후라 일감조차 없던 시절, 빈손으로 귀가하는 날도 허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형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병원 조리사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어머니의 헌신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창시절 나는 사춘기가 있었던가 싶다.
공부는 잘 못했지만, 부모님 속을 썩이는 일은 하지 않고 자랐다. 고3 때의 일이다. 인기 있는 온라인 강의를 듣고 싶어 어머니께 부탁드린 적이 있다. 생물Ⅱ 인터넷 강의와 교재 포함 7만 원. 어머니는 형 등록금, 아버지의 기름값, 내 등록금까지 준비해야 한다며 난색을 표하셨다. 그때 나는 어리고 철이 없었다. 오프라인 학원도 아니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이었는데 그마저도 안 되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도 한 달쯤 뒤, 어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주머니에서 7만 원을 꺼내주셨다. 그때의 손길과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께 빚만 지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피와 땀으로 이룬 대학 4학년이 지나고, 내가 장교로 복무하며 봉급을 저축해 자립하게 되자, 어머니는 비로소 뒷바라지를 마쳤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그제야 얼굴에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고, 표정도 한결 가벼워지셨다.
어머니의 그러한 헌신이 있었기에, 나는 사회생활을 마이너스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취업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사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종종 본인이 번 돈을 내게 주셨다. 그러면서도 늘 “다른 집처럼 많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서른이 넘어 사회에 발을 딛고 나서야, 학자금 대출 없이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비록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여유는 없지만, 독립한 이상 내가 속한 가정을 잘 이끌어가는 것으로 가장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시의적절한 순간마다 작은 금전 지원을 통해 손을 내밀어 주셨고, 그것이 나에겐 늘 절실한 도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 집의 슈퍼우먼이었던 어머니의 강철 어깨도, 이제는 세월과 중력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전화상으로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를 내셨다.
이제는 더는 일하기 어렵다는 걸 본인도 알고 계셨다.
조심스럽게 노후 준비는 어떠신지 여쭈었더니, 그동안 알뜰히 모아둔 것이 있어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 무리가 없을 거라 하셨다.
참 대단한 분이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시면서도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부채 없이 살고 계시다. 한 직장에서 30년. 그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진통제를 드시며 출근을 하신다.
이번 달 말,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일을 그만둘지, 내년 3월 계약 종료까지 마무리할지를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의사의 권유를 따르려 하신단다. 이제는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통화를 마친 뒤,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뼈 빠지게 일하시며 불평 한 마디 없는 어머니. 그저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시는 분. 그런데 나는, 지금 이토록 많은 걸 갖고 있음에도 왜 그리 불만이 많을까.
나 또한 너무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다.
이제와서 뒤 돌아보니, 내가 운전해 몰고 가는 버스의 좌석에는 우리 가족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타고 계셨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중국 고사성어 중에 이러한 말이 있다.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미 칠순이 넘으신 우리 부모님, 특히 어머니. 우리 부모님은 나를 언제까지 기다려 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우리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즐기시게 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이제, 조금 더 편안하게 내 버스의 승객으로서 부모님을 정성껏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