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국가 정통성 전쟁
“선조들의 국적이 일본이냐”라는 간단한 질문이 대국민 논쟁의 장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역사에 걸쳐 70여년 동안 정립되지 못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논쟁 물밑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전쟁을 치러왔다. 국수주의 역사관이라는 과격한 비판에도 묵묵히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국익을 위한 가치를 더 해왔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의 논리적 결함은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으로 여겨져 오며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광복절이라는 명칭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자면, 광복절의 원래 명칭은 독립기념일이었다.
광복절은 1945년 일본의 강제점령에서 벗어난 후 3년간의 미군정 신탁통치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되고 나서도 1년 뒤에야 만들어졌다. 1949년 5월 국무회의에서 ‘독립기념일’을 만들 것을 의결했고, 국회 의결과정을 거쳐 같은 해 10월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광복절’로 명칭이 변경됐다. 명칭을 변경한 이유는 독립, 해방, 광복이라는 3가지 개념은 각기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독립과 해방의 차이는 기존에 실체가 있었는 지의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독립은 그 이전에 독자적인 실체가 없었던 경우 새로이 독자성을 갖추게 된 것을 의미하고, 해방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종속된 실체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 끝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이 각각의 개념들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시점인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기 위한 명칭으로 ‘독립기념일’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법통을 이어받고자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했기 때문에 ‘해방’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기는 시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해방절’이라고 부르지는 못했다. ‘해방’이라고 하는 개념은 ‘피동’의 의미가 짙어서 항일운동가들의 주체적인 항일운동을 부정 당할 수 있다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정통성 시비가 생길 것을 우려했던 시각도 있다. 북한은 8.15를 ‘해방절’이라 칭했고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민족해방’이라는 정통성 전쟁의 체제를 구축해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빛을 되찾다”라는 뜻을 가진 ‘광복’이라는 철학적이면서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로 정했고 ‘독립’과 ‘해방’ 그 어딘가의 개념으로 혼용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민족대표 33인은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했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선조들은 독립을 선언했다.
선조들이 외친 독립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기미독립선언서에 작성된 문장을 살펴보면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祖宗世業(아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라고 언급하며, 식민지배를 받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다른 나래의 지배를 받으며 국가로서 주권을 갖고 있지 않은 나라를 의미한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배는 정당한 통치방법으로 여겨져 왔으나, 1917년 소련 레닌에 이어 1918년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민족 간의 억압과 착취는 사라져야 한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식민지 민족 해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미독립선언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상당히 존재하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에 따라 유추해보면, 선조들은 적어도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당시 조국의 주권을 잃어버렸다고 인식한 듯하다.
항일운동가들의 목숨과 피를 바친 독립운동이 모두 부정되는 꺼림칙한 기분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을 되찾는 과정이 바로 독립운동인 것이고 해방운동이었다. 오히려 주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이 부정될 판이다.
선조들의 국적 논쟁이 어느 정도 해결됐는가 싶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대체 언제인가”에 대한 의문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5월 13일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작업으로 추진돼 같은 해 9월 8일 통합이 성사됐고, 3일 뒤 11일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성정부 등 국내 외 7개 임시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됐다.
입헌주의에 따라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통령제를 도입하며 입법, 행정, 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했다. 1910년 8월 19일 일본으로부터 국권이 피탈된 지 38년 만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 받아 독립국가의 지위를 되찾게 됐다. 입헌국가의 통치원리로서 법치주의가 완성됐다.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로서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정부의 통치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해 수립됐지만,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대신해 미국 국무부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과 같은 해 7월에 의해 작성된 미국무부 기밀문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 번도 행정권을 가진 적이 없고 합법적인 통치권한을 인정받는데 필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언급할 뿐 아니라, 임시정부는 통치권자의 자격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은 미국이 이미 대한민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염두해두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대한민국의 제헌헌법 제10장 부칙 100조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현행법령이란 당시 미군정청법을 뜻한다.
미군정청은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 21호를 공포했고 일제시기에 적용됐던 법령 중에서 이미 폐지된 것을 제외하고 미군정청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효력을 인정하도록 했다. 이후 대한제국, 일본, 미군정청 각기 다른 주체에 의해 공포된 다양한 형태의 법령을 정비했고, 현재에 이른 것이 대한민국 헌법(입헌주의)과 법령(법치주의)이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일본법에 의해 1960년 초반까지 지배받게 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법률이 일본법(대륙법계)의 영향을 받게 된 배경이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에 대한 적법성을 이해해보자면 온전히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유사한 개념으로 가계약의 법적 성질로 설명하고자 한다.
가계약은 계약의 준비단계, 계약 교섭의 기초로 보거나 예약 등으로 파악할 수 있으나, 가계약이 정식계약의 효력을 가지는 것은 부당하다. 가계약은 정식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계약을 체결하고 정식계약을 통해 계약이 성립됐을 때, 계약일은 계약이 성립된 날인 정식계약의 체결 날이다. 정식계약만을 인정한다고 해서 가계약의 성질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계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식계약의 성립에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법적 성질의 맥락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일로 지정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질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국일로 살핀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서 본연의 목적을 위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되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도 또는 의사표시가 왜곡되게 된다.
항일독립해방운동 맥락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북한과의 정통성 전쟁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초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국가는 소련이다. 소련 레닌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통해 민족 간 억압의 구속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식민국가들의 독립을 위해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
그에 대한 대가, 소련의 의도는 식민지 독립을 통해 1국가 1공산당 체제 진영을 만들고자 했다. 이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으로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다.
소련 코민테른(국제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두고 독립운동 계파간 탈취사건이 발생했다.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심신을 바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보내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코민테른의 자금 갈등으로 김립을 숙청하고 이동휘와 갈등을 빚기게 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코민테른의 자금을 임시정부에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위여부에 대한 추가 논쟁도 있지만, 김구 선생이 소련에 접촉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기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련으로부터 실제 지원을 받은 바 있다. 이런 이유를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소련의 연계, 제휴 조직이라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난을 극복해야 했다.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도 있었고,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지만 자금을 원했던 사람도 있었다. 공산주의에도 반대하고 공산당의 자금 자체를 반대했던 사람이 있기도 했다.
북한의 정통성 전쟁은 이 맥락의 논적 구조를 파고든다.
북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해림시정부'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염두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장을 김일성에게 전달하려 했다는 내용으로 체제선전 영화를 제작해 배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시도했지만, 한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 끝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근거가 상당한 수준으로 마련됐다.
김일성은 분단 국가 구성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고자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서야 1948년 9월 9일 인민정부수립을 선포했다. 남북통일국가 수립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 김일성은 민주기지론과 국토완정을 내세웠다.
분담의 책임 문제가 민족의 비극사인 625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배경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정부수립과정에 대해 서술한 글은 단순히 여러 주장들을 취합해 논거에 따라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각각의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필자가 건국일 논쟁과 관련해 장문에 걸쳐 서술한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역사 속에서 정통성 전쟁이 이뤄지는 방법 중 하나로, 단편적인 모습이라도 표현한 것에 의의가 있다.
대한민국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사에 가치를 부여하는 정통성 전쟁에는 단순히 일본과 북한의 관계 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미국 등 다자간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건국전쟁의 연장선이다.
건국역사 논쟁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은 “먹고사는 일이 급한데, 이념 논쟁이라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거 항일운동가들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 독립이 급했고, 자금은 열악했으며, 이념도 각기 달랐다.
항일 독립 해방운동은 사상적 이념을 정립하고 정통성 전쟁을 준비해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뜻을 모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각각의 차이와 다름이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재단할 여력이 없었던 만큼 국권 회복 과정은 처절했고 치열했으며, 때로는 비정하고 잔혹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논리 정연하고 일관되게 설명하기 어려운 논증적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통성 전쟁이고, 친일 논쟁과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 극일이다.
이에 필자는 대한민국 건국전쟁의 연장선이자 정통성 전쟁 과정에서 단순히 논리적 구조의 결함을 왜곡하며 친일이라 일컫는 자들에게 묻는다.
“이제 누구의 무덤에 침을 뱉을 것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