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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포식자와 피식자(그림형제 동화의 쥐와 고양이)

먹고 먹히는 이야기는 애정에 관한 이야기이며 훨씬 더 내밀한 이야기이다. 맛있다, 맛없다는 입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도 맛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음식과 대화하는 것이며 흡수되어 우리 몸 일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로 변하여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에 당연히 신중한 검토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맛은 내 몸에 잘 맞는지가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것처럼 애정도 그러하다. 애정은 지능과는 상관없고 인간의 감성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냥 끌린다. 맛과 애정은 자유의지가 가장 약한 고리이다. 사랑을 먹을 것으로 주지는 않은지, 먹을 것으로 나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시라.     

동물을 표현되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아직 인간으로 분화가 되기 전의 모습이다. 또한 동물로 표현해야 의식은 놀라지 않고 무의식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나는 쥐일까? 고양이일까? 자신도 모르게 쥐처럼 살고 있고, 고양이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충격적인가? 아직 무의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은 돌이 되어버렸다. 진실을 보려는 자는 언제나 신의 가호가 깃들어야만 한다.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관계는 항상 존재한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내며 동물과는 다른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 약자를 보호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교묘하고 사악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경계에 서 있다. 악마처럼 교활하거나 천사처럼 선하거나 동물처럼 포악하다. 동물처럼 아예 자신의 생존을 위한 모습만 보이기만 해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강자의 먹잇감에 불과한 쥐의 결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고양이처럼 약삭빠르고 교활한 이는 누가 먹잇감인지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다가온다. 그는 상냥함과 공격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먹이감에게는 매력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자율과 공생을 자유롭게 바꾸어가며 상대를 혼란시켜 공생하기보다는 경계해야 하는 고양이를 쥐는 곁에 두게 된다. 욕구로 대변되는 고양이는 배가 고프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까지 먹어치우고 다른 사냥감을 찾으러 뒷골목을 어슬렁거린다. 

또한 고양이는 상징적으로 불안을 의미한다. 불안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는 두려움과 우려를 나타낸다. 먹을 것이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은 형상를 가지고 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다가와 공격한다. 시간과 공간을 휘젖는 불안은 현실과 사람, 상황, 사회적 소외, 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형체와 크기를 짐작하지 못하게 하면서 서서히 잠식되어 간다.  

   

약자는 속는다.

고양이의 상냥함과 지속적인 구애는 쥐의 본능조차 속이게 만들었다. 약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해할 자를 알아본다. 그러나 먹잇감에 대한 집요함은 고양이의 특징이다. 사냥꾼들은 먹잇감이 쉽게 오지 않는 걸 안다. 그래서 이들은 한번 온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고양이나 쥐는 욕망이 결핍되어 있지만 고양이는 욕망의 결핍은 공포로 포장할 수 있다. 결핍을 채워줄 존재로 보이는 것은 상당히 유혹적이다. 힘이 있어 보여서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아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지게 한다. 욕망을 가진 자들에게 힘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투사해 스스로 희생물로 바친다. 일반적인 쥐와 같은 사람은 의존적이지만 경계심이 많아 모든 것에 조심하고 신중하며 자신의 욕구를 참을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 대해 낙관적이고 관대하다.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건강한 자들은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자신을 결코 희생양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쥐는 양심적이고 신중하고 인내심이 많지만 의존적이기에 세상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끊임없이 애정을 확인해주는 고양이와 함께 있는 쥐는 누구를 의심하는 것조차 죄책감을 갖는다. 쥐의 회색 옷과 땋은 머리는 자족적인 수행을 하는 구도자의 모습이지만 진정한 생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머리카락을 땋는 것으로 본능과 충동을 묶고 욕망과 기억을 봉인해야 한다.     

아직 인간으로 분화되지 못한 동물로 가장하여 인간적 관심과 열망을 가장해서 말한다. 우화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못된 동물이 곤란하게 되는데 그림 형제 동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쥐와 고양이를 등장시켜 먹고 먹히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그림형제 민담에서 동물이나 사물을 등장 인물로 나오면 그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진실에 접근하는 우리에게 정신적 쇼크를 최대한 완화시키기 위해 쥐와 고양이를 내세웠다. 포식자와 피식자,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먹잇감에 불과한 쥐의 결말은 처참하다.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

고양이의 상징적 의미는 불안이다. 고양이처럼 약삭빠르고 교활한 이는 누가 먹잇감인지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다가온다. 고양이는 상냥함과 공격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고양이는 자율과 공생을 자유롭게 바꾸어가며 상대를 혼란시킨다. 공생하기보다는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고양이같은 사람이다. 여기에 고양이는 욕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참았던 욕구는 배가 고프면 한순간에 우리를 삼켜 버리는 모습을 실제화시켰다. 욕구를 충동적으로 내지르면 자아는 놀라게 된다. 글을 쓰고 지금, 쥐에 대한 연민보다 고양이같은 삶이 더 나아 보이는 것은 세상의 법칙과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이상이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는 내가 지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넘어서 다른 발달과정으로 가야하는데 쥐라는 캐릭터는 그 자리에 넘어서지 못한 자이다. 쥐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고양이의 유혹에 넘어갔다. 과분한 애정을 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타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의존적인 사람은 자신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기에 타인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판단이 흐려져 분별할 힘이 없다. 쥐의 회색 옷처럼 정신은 자족적인 수행을 하지만 진정한 생기는 하나도 없다. 고양이가 세례식에 간다고 할 때 쥐는 달콤하고 향긋한 붉은 포도주를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했다. 포도주는 영혼의 힘을 상징한다. 고양이와 생활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혼이 고갈되어 가는 것을 쥐는 본능적으로 안다. 

쥐가 가지고 있는 특성,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인내심이 많은 쥐는 자신의 욕망을 고양이에게 투영하여 그의 힘을 가지고 싶어 자신의 분별력을 무시했다. 본능적인 위험에 대한 조심성을 강제로 몰아내고 어떤 느낌에 대한 것에도 장벽을 세워 애써 무시해 포식자에게 삼켜지게 되었다.

둘은 겨울을 대비해 요리용 굳기름 한 단지를 샀다.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고 결국 교회에 두기로 했다. 의견은 고양이가 냈다. 힘든 시기에 쓰려고 준비한 것을 보관하는 장소로 교회 제단은 초자아를 상징한다. 초자아에 맡겨보지만 고양이의 욕망에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꼭 필요할 때 쓰자는 고양이의 말은 쥐와 고양이를 위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고양이를 위한 말이다. 내가 필요하면 건드릴 수 있고, 네가 필요한 경우에는 건드리지 말라. 그 말은 내가 우선이 되는 자들의 언어이다. 욕구가 많은 사람은 방법을 생각해낸다. 겁주고 기죽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은 그에게 지식과 건강과 자신감을 빼앗으면 되는 걸 안다. 지식과 건강과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통제하기 힘들다. 그는 쥐에게 가치없는 사람이라는 느낌과 비난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고양이의 지배적인 성향은 쥐에게 과도한 허구적 죄책감을 넣어주었다. 쥐 역시 굳기름이 먹고 싶지만 참고 있기에 그런 마음을 갖는 것조차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했기에 고양이 말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욕구는 그때 그때 동화되지 않아 임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 

굳기름이라는 것은 먹거리로 소유물을 의미한다. 물질, 노력, 에너지, 지식까지 모든 것을 말한다. 그들이 가진 소유물을 양심에 맡긴다고 했지만 고양이의 욕구는 갈수록 커져간다. 감정적 협박을 반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 공갈과 협박이 왜 통하는가? 고양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공갈과 협박으로 얻어내는 자를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널 고통스럽게 만들 거야”라는 말을 실제로 하지 않아도 쥐는 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 초자아를 상징하는 교회의 제단은 자신의 내적 권위와 현실보다는 이상을 나타내고, 도덕적, 사회적, 비판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의 중재 부분이며 자유분방한 본능의 활동을 억제한다. 초자아는 자아 이상과 양심이라는 두 개의 체계가 있다. 초자아는 양심의 통제에 의해 에너지 방출을 억제하는 장소이다. 본능에 지배되는 자는 충동적이며 초자아에 지배되는 자는 완벽주의자이거나 지나친 도덕군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배가 고픈 고양이에게 초자아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는 본능에 지배되어 충동적이기 때문이다. 욕구를 참지 못한 고양이는 조카의 세례식에 가야 한다는 거짓을 말한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고양이가 말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거짓말은 점점 더 짙어진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4가지 특성이 있다. 말실수, 장황한 말, 상징 동작의 실수, 미세한 표정이 그것이다. 고양이의 장황한 설명이 그것이다. 갈색 반점이 찍힌 하얀 놈이라고 말했다. 몸이 온통 흰 고양이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만 조카의 몸은 찍힌 갈색 반점으로 그의 삶은 이미 얼룩으로 덮여 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살고있는 곳과 갈등하며 사회적 가치에 존중감이 없고,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자신의 좋지 못한 행동에 대한 죄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조카지만 그는 이미 그들과 같은 종족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집단에서 이탈한 고양이라고 해서 그들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쥐의 착각일 뿐이다. 조카의 이름은 ‘위없다’. 의존적인 쥐는 자신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기에 판단력이 흐려져 분별할 힘을 잃는다. 또 그의 깊은 의식 속에는 속이는 자와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피해자가 거짓을 눈감아 주는 이유는 끔찍한 결과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깊게 생각하면 상대방을 의심하는 것 같아 판단을 중지하고 상대가 거짓말을 하도록 방치하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거짓을 거짓으로 보지 못하도록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고 진실은 거짓으로 보게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도록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행동과 말이 다를 때, 아이는 모순을 발견한다. 모순을 말하는 순간, 아이는 벌을 받고 부모는 자신의 모순을 합리화시킨다. 구별할 능력을 상실한 아이는 거짓을 분별할 수 없고 본능적으로 거짓에 민감해진 아이는 위험을 감지할 능력을 왜곡시킨다. 거짓을 밝혀냈을 때 돌아오는 형벌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힘들다. 거인같은 부모의 공격을 감당할 힘이 없는 아이는 거절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좋은 부모가 거짓일 리가 없어. 내가 나쁜 거야.”

고양이는 자신의 일도 쥐에게 떠넘긴다. 일을 핑계로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 좋은 아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다. 먹고 싶은 욕구를 지닌 고양이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지닌 쥐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것이 있기에 같이 살고 있다. 쥐는 자신의 감정조차도 빼앗기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기껏 욕구를 표현하는 것조차 부드럽게 말한다. 

“먹을 때 나를 생각하라.”

자신도 욕구가 있는 자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지만 자신의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은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힘있는 자들과의 의사소통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느낌이나 생각을 주고받는 행위이고 본질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대를 조종하는 행위이다. 신호를 보내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대를 조종하는 행위이고 뭔가 얻을 것이 있을 것이라는 묵시적 암시를 보내지만 그들은 절대로 나눌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상대에게 좋게 하려는 무엇인가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상한 느낌을 받지만 쥐는 모른 척하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잔다. 

첫 번째의 거짓이 통하고 배가 부르지만 욕구가 강한 자들의 문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묵인은 동의이다. 모른 척한 쥐에게 고양이는 두 번째 거짓을 허용하게 만들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네가 허락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첫 번째의 묵인이 그것이다.

두 번째 조카는 목에 하얀 띠를 두른 놈이라고 했다. 거짓과 폭력과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은 죽음을 달고 살아간다. 사회에 일탈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자들에게 인간의 삶은 없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에게도 자신의 거짓이 밝혀지길 원한다. 그는 목에 하얀 띠를 두른 놈이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쥐가 죽을 운명을 가진 자라는 것 흘린다. 

협박과 피협박은 모두에게 뿌리깊은 문제가 존재함을 말한다. 협박과 공갈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과 그 협박의 희생자는 왜 자신이 희생당하도록 내버려 둘까? 인정욕구를 고양이에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고양이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양이같은 자들의 활동시간은 밤이다. 자신의 죄를 보고 싶지 않는 고양이같은 자들은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가 그들의 활동시간이다. 거대한 욕구로 인해 그의 인식세계는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밝은 세상을 다닐 수가 없다. 협박자는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뭔가 죄책감이 들게 만들고 저항할수록 관계를 힘겹게 한다. 관계를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은 쥐같은 사람은 협박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협박자는 반복해서 먹을 것을 요구한다. 시간, 에너지, 재능, 노력, 물질. 고양이의 내면세계는 쥐에게 중요한 것을 얻으려면 갈취하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욕구불만의 소유자이기에 초창기의 타협적인 모습은 어느 순간 독단적인 모습으로 바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쥐가 외면했을 뿐이다. 그의 집요함이 애정으로 포장되었기에 가능했다. 고양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쥐의 자아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방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하게 된다. 

 세 번째 조카는 발들만 하얀 놈이다. 굳기름 단지의 밑바닥까지 다 먹은 고양이는 더 이상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검은 사람으로 변했기에 자신을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은 범죄의 소굴일 뿐이다. 고양이의 조카들처럼 그 역시 친족들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는 타인을 갈취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에게 도덕과 양심이라는 초자아는 더욱 확대되어서 자신은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굳기름을 다 먹은 고양이는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본능과 초자아의 싸움이 끝난 고양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자 둘은 교회 제단 아래 저장된 굳기름을 꺼내먹기로 했지만 이미 다 없어진 뒤였다. 고양이의 거짓에 애써 외면한 쥐의 운명은 자신까지 고양이의 먹이가 되어야 했다. 고양이가 쥐에게 한 행동이 이해되지 않지만 쥐 역시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을 뿐 욕망이 숨겨져 있다. 고양이와의 동일시,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한 미련함과 고양이의 본능을 외면한 게으름이 그것이다. 

고양이와 쥐는 항상 같이 움직인다. 협박자와 피협박자, 가해자와 피해자. 그들의 관계는 손바닥과 손등이다. 쾌락에 맡겨진 자들은 쾌락이 자신을 좀먹는 걸 알지만 쾌락으로 인해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통의 지연이다. 현실 고통, 외롭고, 노동을 해야 하고, 혼자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안락함에 안주이다. 그것은 고양이가 한눈에 반하게 하는 매력적인 먹잇감이다. 

내면의 갈등으로 인한 불안은 우리에게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만든다. 거짓이 보이는데도 순간의 고통(그것은 버림받음이다.)을 피하기 위해 포식자라고 명명되든, 협박자라고 명명되든 존재의 위협에 타협하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본능과 자아와 초자아 간의 갈등에서 무조건 참는 쥐와 같은 자아는 결국 본능에 먹히기 직전 저항하려고 했지만 범죄에 가담한 존재가 되고 만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의 세 번째 조카가 발은 하얗다고 했다. 그것은 그림형제가 주는 작은 희망이다. 자신의 욕구에 모든 것을 다 맡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희망 말이다. 고양이에게 쥐가 삼켜졌지만 아직은 소화되지 않아서 누군가의 도움이든, 자신이 가진 힘으로든 그 상황을 극복해낼 것이라는 암시이다. 엄마 염소가 아기염소를 잡아먹은 늑대의 배를 갈라 아기염소를 구해냈듯이 삼켜진 쥐도 구해질 수 있다. 세상 이치가 고양이에게 먹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하얀 발이 주는 의미는 변화를 시도하면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또 쥐와 같은 자는 고양이에게 먹혀야 할 필요도 있다. 나쁜 것을 배워야 하는 시기도 필요하다. 좋은 사람이란 타자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좋은 것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 정직하지 못한 자들의 말로이지만 쥐는 고양이를 극복할 것이다. 삼켜진 쥐는 고양이 뱃속에서 소화되기 전에 탈출하길 바란다. 발만 하얀 고양이 새끼가 쥐의 다른 모습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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