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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홀아비의 딸과 과부의 딸

어떤 선물을 줄까(그림형제 동화의 숲속의 난쟁이)


우리나라의 민담 콩쥐와 팥쥐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숲 속의 난쟁이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버지를 가진 딸과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속임수를 쓰는 엄마를 둔 과부의 딸이 이야기 주인공이다. 결혼생활이 좋지 않은 부부는 홀아비와 과부처럼 살아간다. 부모의 문제는 아이들에게 전달되어 아이들은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아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심리적 유전을 이어간다. 기억은 삶의 목차와도 같다고 했다. 경험된 것들은 마음의 병이 생겼을 때 무기가 되어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더 깊은 병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는 환경이 좋을 때는 과부의 딸처럼, 환경이 나쁠 때는 홀아비의 딸처럼 행동한다. 우리의 도구와 제도는 성경 시대와는 다르지만 마음의 심층구조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과부의 속물근성은 굴욕과 자기 증오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아버지의 부재

홀아비의 딸에게 과부는 “네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면 너는 매일 아침 우유(창조의 물질)로 세수하고 포도주(영혼의 힘)를 마시고 내 딸은 물로 세수하고 물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는 자신의 말을 자녀에게 전달하게 한다. 상처받은 아이를 다루는 방법은 처음엔 먹이고(영양가), 씻기고(와인으로 마시고), 달콤한(좋은 말)로 달래는 것이다. 기분좋은 음식을 먹는 이유가 상처받은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본능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딸이란 아버지와 친한 아이를 말한다. 한집에 살면 유달리 나와 닮은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상대방을 닮은 아이보다 편애하기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은 가정생활 속에서 아이는 상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의 속임수를 넘어가고 그들의 약속은 믿었다며 상대의 배신에 분노를 느낀다. 그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면 인간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가진다. 그리고 다들 내 맘 같지 않다면서 고집을 부리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계속 상대에게 의존한다. 아버지와 닮은 딸은 과부의 친절한 말에 속는다. 그녀에게 없는 따뜻한 결핍은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결혼 생활이 기쁨 반, 고통 반이라는 것은 남자로서의 기쁨과 아버지로서의 고통을 말한다. 남자로서 자신이 없는 그는 딸에게 결정하도록 시켰다. 객관적이지 않다는 핑계로 자기방어를 하는 무책임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또다시 더 무책임하게 무서운 모성에게 넘겨주었다. 소녀 역시 모성이 주는 음식과 쾌감에 대한 욕구로 아버지를 무서운 과부에게 넘겨주었다. 아침에 우유로 세수하고 포도주를 마시는 삶은 신분 상승의 욕구를 의미한다. 동물성인 우유와 식물성인 포도주로 전체성을 보장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물보다 못한 것이다. 섭취하는 행위는 내면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장악하는 힘의 강화를 의미한다. 의식에 의해 무의식 내용을 동화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욕구는 허기이고 만족은 포만감을 나타내는데 홀아비 딸의 욕구는 무서운 모성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러 소녀는 고난을 겪게 된다. 

결혼한 다음 첫날 아침은 홀아비의 딸은 우유로 세수하고 포도주를 마셨고, 과부의 딸은 물을 마셨다. 둘째 날은 두 딸 모두 물로 세수하고 물을 마셨으며 셋째 날부터는 홀아비의 딸은 물로 세수하고 물을 마셨고, 과부의 딸은 우유로 세수하고 포도주를 마셨다. 다음날부터는 셋째 날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 

남편과 사이가 좋아지면 아이들에게 친절해지는데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일상이 되어버린 부부는 전과 다름없이 살아간다. 슬프게도 여기서 홀아비의 딸은 아버지마저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버지들은 여자와 사이가 좋아지면 자녀와 말을 섞을 일이 별로 없다. 아버지와 친한 딸보다 엄마와 친한 딸이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엄마의 영향력 아래 놓인 딸은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아버지를 닮은 딸은 언제나 엄마의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데 남성성을 알고 있는 홀아비의 딸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잘하게 된다. 자신말고 타인을 알고 있는 홀아비의 딸은 문제 상황에 잘 대처하는 기초를 갖는다. 아버지의 결혼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기본적인 신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은 정신 건강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이다. 과부의 지속적인 괴롭힘에도 소녀는 대항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집 밖으로 나간 홀아비의 딸

종이로 만든 옷을 입고 겨울에 밖에 나가 딸기를 따오라는 엄마에게 그녀는 자신의 말을 한다. 겨울에는 딸기가 자라지 않고 종이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 부당한 요구에 소녀는 자신의 말을 할 줄 안다. 그녀는 단호히 거부한다. 

한겨울의 딸기는 절망과 좌절감을 가지게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정해주는 것이다. 홀아비의 딸에게 성공을 맛보게 할 수 없다는 나쁜 모성의 모습이다. 추운 겨울날은 소녀를 외롭게 만드는 장치이며 종이옷은 그녀에게 어떠한 보호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과부는 그녀에게 굳은 빵 한 조각을 주고 밖으로 내쫓았다. 빵은 육체이며 생계를 의미한다. 생명과 에너지와 지식과 애정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모두 딱딱하여 먹기 불편한 것들이다. 그녀의 딱딱한 빵은 오랫동안 쌓인 설움과도 같은 것이다. 홀아비의 딸은 부정적인 모성에 저항할 힘조차 빼앗겨버리고 숲으로 쫓겨난다. 과부의 못된 행동은 좋은 것으로 바꿀 전환점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박해하면서 돕는 역할은 언제나 못된 의붓엄마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닥치게 된 위험과 위협은 소녀의 기본적 심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삶이 다르게 된다. 성격이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키도 작고 볼품없는 어떤 소년은 자신이 꿈꾸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정적인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장점도 알고 있었다. 장점을 키우기 위해 부정적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는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인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잘 살아가고 있다. 좌절이 와도 그는 좌절에 주저앉을 시간에 극복하는 방법에 더 매진할 뿐이다. 자신의 꿈을 주저앉힐 사람은 본인뿐이다. 

     

숲속에 가면

숲에 가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숲에는 무서운 동물도 있지만 도움을 주는 조력자들도 함께 존재한다. 이 소녀에게는 아직 마법의 시간이 남아있다. 숲에는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오두막집도 있다. 그곳에는 난쟁이가 살고 있다. 난쟁이는 도움을 주는 존재이다. 그들은 어려울 때 나타나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선물을 준다. 그러면서 난쟁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미숙한 성인으로 늘 다른 사람에게 요구를 하는데 요구를 들어주면 대가를 주고 들어주지 않으면 복수를 한다. 그들은 우리의 부족한 어떤 면에 능력이 있기에 그들을 잘 다스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 숲에 사는 태모가 나타나지 않으면 태모의 영역에 있는 난쟁이가 도움을 준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녀의 태도는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공손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다. 곤경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이 드러난다. 조그만 오두막의 따뜻한 난로는 난쟁이가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서 잠깐 질문이 있다. 아래 부분을 가리고 잠시 생각해보자.  

   

빵을 먹으려고 할 때 난쟁이는 소녀에게 빵을 나눠달라고 했다당신이라면 몇 조각으로 나눠줄 것인가?   

  

소녀는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눠주었다. 난쟁이는 세 명인데 왜 두 조각이었을까? 난쟁이는 소녀에게 달라고 하는 했기에 소녀 자신이 먹을 것을 남기고 주어도 난쟁이는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공평한 것인가. 내 것을 남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얇은 종이옷을 입었을망정 스스로를 보호할 장치는 가지고 있다. 소녀는 자신을 함부로 낮추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존엄함이란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무리 추운 겨울에 쫓겨나 숲을 헤매고 있어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도 잘 대접하는 사람이었다. 내 것을 내주면서도 자신을 제외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를 제외한다. 자신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데 타인이 자신을 대접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과 다르다. 소녀는 빵을 나눠주면서 아무런 이익을 바라지 않았다. 칭찬이나 인정도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운 날씨에 자신의 몸을 녹이게 해준 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나눠주었고, 자신 역시 배고프지 않는 가장 최적의 분배를 했다

3명의 난쟁이에서 3은 완성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변화의 시간이 도래되었음을 의미한다. 소녀의 딸기 찾기에 난쟁이들은 도움을 주었다. 난쟁이 집 뒷문 밖에 눈을 치우면 그곳에 탐스러운 딸기가 있다. 딸기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눈은 차갑고 고착되고 상처받은 것을 상징한다. 내 뒷마당의 눈은 내가 직접 쓸어야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 무의식을 청소하면 소유하게 되고 능력이 발휘할 수 있다. 

산딸기처럼 나무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대지에서 자라난 딸기를 과부는 요구했다. 딸기가 가진 특별함은 기쁨이고 표면에 씨로 둘러싸인 붉은 딸기는 에로스적이다. 과부에게는 에로스가 부족했기에 대지의 딸기를 가져오라고 했고 그것은 홀아비의 딸만 가지고 올 수 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도 계모들이 의붓딸에게 찾아오라고 하는 딸기는 땅딸기이다. 그녀들은 에로스가 없기에 기쁨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선물을 줄까

자신들에게 빵을 나눠 준 홀아비의 딸에게 난쟁이들은 3가지 선물을 준다. 완벽한 3가지 선물. 예뻐지고 입에서 금조각이 나오고 왕비가 되는 선물은 좋은 관심을 받게 되고 훌륭한 언어, 즉 긍정적 말의 기술과 특별한 위치에 서게 되는 최상의 선물을 받게 된다. 소녀가 공손하고 상냥하고 친절해서 받는 선물과 스스로 일을 해서 받는 선물을 가지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소녀가 말할 때마다 나오는 금조각은 그녀가 속한 세상을 다 덮는다. 그녀의 긍정적인 말은 금조각과 같아서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영향을 받게 된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함께 있으면 즐거워지는 사람, 힘든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게 주변을 밝게 하는 사람. 

집에 돌아온 의붓딸을 시샘한 친딸은 자신도 가려고 하자 엄마는 만류한다. “안 된다. 얘야, 안 된다. 얘야. 하지 마라.” 호기롭게 자율적인 행동을 하려는 아이에게 부모들의 잘못된 각본이 주입된다. 아이들의 의지력을 꺾는 말들이 있다. 넌 잘못하니까, 넌 어리니까,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 넌 아무것도 하지 마, 공부만 해, 넌 어차피 몰라, 넌 몰라도 돼. 이런 말들은 아이들의 성장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실수나 호기심을 꺾어버린다. 실수는 실패가 되고 호기심은 관음으로 점프 업 되어버린다.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작은 경험조차 실수가 되어 자립하려는 의지를 없애버리는 과부가 되어버리는 과오를 저지른다. 

고집피우는 친딸에게 과부는 멋진 털코트를 지어주고 버터 바른 맛있는 빵을 준다. 아이들에게 완벽한 보호와 넘치는 애정은 자본금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질 천성을 갖추지 못하면 그것은 아이에게 해가 될 뿐이다. 넘치는 것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부족하면 채우면 되지만 넘치는 것은 오물이 된다. 

친딸은 들어갈 자격이 없는데도 난쟁이 오두막에 들어간다. 난쟁이는 친딸을 의붓딸과 똑같이 대한다. 기회와 조건은 늘 누구에게나 똑같이 온다. 딱 하나 상수는 인간이다. 인간이 가진 성품에 따라 성공 여부는 달라진다. 형편없는 자에게도 횡재할 기회는 주어지나 중요한 것은 빗자루로 뒷마당을 쓰는 행위를 하느냐 안하느냐이다. 딸기는 어떤 일을 한 보수이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눈을 쓸었다면 딸기는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공의 절반은 언제나 자신의 노력이다.     

의붓딸에 했듯이 빵을 나눠달라고 했고 친딸은 거절했다. 난쟁이의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기에 간섭할 수 없다. 스쳐 지나간 어떤 행동이 나쁜 선물을 받느냐, 좋은 선물을 받느냐만 달라질 뿐이다. 심보가 고약하고 욕심많고 인색한 아이는 얼굴이 흉해지고 두꺼비가 나오고,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는 난쟁이의 악의어린 선물을 받게 되었다. 과보호된 아이들의 결말이다. 인간 행동의 독특성은 미래에 발생할 결과를 가져온다. 보통 우리는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즉각적인 만족이나 쾌락을 버리거나 미룰 줄 알고 같은 맥락에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계모 딸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였기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떠나야 할 시기

갈수록 예뻐지는 홀아비의 딸이 너무 미워 견딜수가 없게 된 계모는 솥을 올려놓고 실꾸러미를 끓였다. 그녀의 실꾸러미는 엄킴과 혼란과 미로처럼 보인다. 의붓딸이 과부와 함께 사는 삶은 혼란과 갈등의 시간을 보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은 이 천과 저 천을 연결시키고 하며 천을 짤 수도 있는 것이다. 실은 끓이며 부드러워지듯이 관계를 맺는 것 또한 부드러워지게 한다. 의붓딸에게 나쁘게 하려는 방법은 어떻게 하여도 좋은 식으로 풀려나간다. 그것이 소녀의 성품이다. 여기서 환경과 유전자에 대한 논란이 나온다.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에 따라 태도는 바뀐다. 계모의 터무니없는 요구에도 의붓딸은 해낸다. 뜨거운 물에 끓이는 행위는 오염된 것은 없애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고 찬물에 헹구는 행위는 소녀가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소녀의 관계맺기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계모는 어깨에 실을 걸쳐주고 도끼 한 자루를 들려주었다. 어깨는 힘을 받쳐주는 곳이며 도끼는 단단한 것을 부수는 도구이다. 그것으로 얼어붙은 자기방어를 깨야 한다. 얼어붙은 물, 얼음은 극단적인 정체 상태를 나타낸다. 즉 영혼에 온기가 없는 상태 즉 영혼의 죽음 상태는 도끼처럼 강한 도구로 과감하게 쳐서 깨야한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도끼를 들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백설공주의 유리관처럼 얼음은 그녀의 영혼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이 깨졌을 때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아니무스를 만나게 된다. 

왕을 만났을 때 의붓딸은 자신은 천한 집 딸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씨는 천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내면에 간직한 아름다움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통의 민담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숲속의 난쟁이에 마지막 선물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일 년 후 왕비는 아들을 낳았다. 의붓딸의 수동적인 내면에 능동적인 아들이 태어났음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왕에게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던 의붓딸이 보완되고 능동적인 활동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의붓딸이 왕비가 되어 아들까지 낳자, 그동안 숨겨왔던 본성이 드러났다. 

    

이야기의 변환

의붓딸이자 친딸이었던 소녀는 두 번이나 난쟁이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구박받을 때는 착한 딸이 되지만 사랑받을 때는 친딸이 되어 못되게 행동했던 것이다. 왕의 사랑을 받으니 그녀는 못된 딸로 변하게 되었다. 성공의 지점에 이르는 자들은 심한 자기만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새롭게 창조된 인격은 그것을 받아낼 용기에 따라 다르게 부각된다. 낯선 것들은 익숙하지 않다. 익숙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새롭게 변화된 삶을 받아들여 도약의 기회로 삼고 싶은 마음의 갈등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병약한 상태의 왕비 머리채를 잡은 계모와 발을 잡은 계모의 친딸은 그녀를 강으로 던졌다. 병든 왕비는 오리처럼 살아간다. 상식적이지 못하고 행위는 이상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충동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왕비는 최고의 정신에서 가장 저급한 형태인 동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오리는 가끔 선한 모성으로 변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다시 오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계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기를 양육하는 왕비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주방에서 일하는 소년은 왕과 왕비를 매개해주는 역할을 한다. 중재자 역할을 하는 소년은 주방에서 일하기에 저급한 왕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왕에게 말을 전할 수 있는 왕의 말과 오리의 말을 전달해주는 소년은 문턱처럼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면서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무의식 강의 세계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왕의 검이 필요하다. 왕과의 관계에서 친딸이 되어버린 왕비가 다시 왕비로 돌아가려면 왕의 날카롭고 단호한 타나토스를 필요로 한다. 마차로 태워간 왕이기에 그녀의 운명에 같이 동참해야 한다. 홀아비처럼 그녀를 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장화라는 남성성만 가지고 있으나 왕은 검을 가진 최고 권력자이다. 

마지막에 계모와 친딸은 끔찍한 벌을 받게 된다. 벌을 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에게 줄 벌을 본인에게 직접 고르라고 하면 자신이 받을 줄 모르고 가장 잔인한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으로 자신이 정한 벌은 불평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악의 처벌은 위험하다. 처벌을 내린 자에게 되돌아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스스로가 선택하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계모와 친딸은 죽어야 한다. 그녀들은 왕비가 다시 그들의 세계와 연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왕이 왕비의 머리 위로 휘두른 검으로 어두운 저주는 벗어나게 되었다. 못이 잔뜩 박힌 통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로 상처를 받게 되는 벌이다. 그것은 말로 상처를 준 계모와 친딸에게 가장 어울리는 벌이다. 그들은 강이라는 무의식 속에 가라앉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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