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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쓸데없는 것이 돈이 된다

무서움이라는 기술(그림형제 동화- 무서움을 찾아나선 소년)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을 배우는 것처럼 두려움도 배운다. 유아에서 성인이 되기까지 많은 경험을 여행이라고 할 때 불안과 공포는 여행 과정에서 만나는 감정이다. 감정을 형상화한 공포는 대상이 있으나 불안은 구체적 대상이 없어도 느낀다. 남성 사회에서 입문제의는 책임있는 자아로서 개체적 고유한 활동을 요구하기에 항상 시험과 담력평가를 한다. 개인적 부성인 아버지로부터 나와 집단의 부성을 배워야 하는 시기가 다가온다. 무서움은 충격과 공포와 관계가 깊고 두려움은 불안과 우려와 관계가 깊다. 무서움은 무언가 공포스러운 것을 보거나 듣거나 경험했을 때 발생하는 혐오감으로 무언가 끔찍한 것을 인지했거나 매우 불쾌한 무언가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두려움은 앞으로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을 예상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이다. 두려움과 혐오감이 복합된 것이 무서움이라고도 한다. 인간을 특징짓는 구체적인 자질 중 하나는 아무도 제거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혐오는 생각보다 몹시 위협적이다. 잔혹성, 부정직, 배신이 끊임없이 드러나는 혐오는 적극적인 폭력을 부추기고 정당화한다. 그것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고 의지할 곳이 없게 만들며 기쁨을 앗아간다.     

 

영리한 큰아들과 멍청한 작은 아들

여기에 나오는 소년은 모두가 멍청하다고 할 정도로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는 무서움을 알고 싶어 한다. 자신말고 외부에 의존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자신이 의존하는 세계와 묶인 끈이 끊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의존하는 세계에 적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두려움이 지배한다. 아버지의 큰아들이 영리하고 지혜롭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일을 잘 해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부성성의 세계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혜롭고 상황에 잘 대처할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그는 건강한 사람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사는 혈통중심의 사회에서 아픈 사람을 대변한다. 그는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하지 못하고 배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도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세계에 쓸모없을 뿐이다. 

평생 짐이 될 것이라는 수치심을 작은 아들에게 큰 아들과 마을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표현한다. 부모의 기대가 죄책감과 수치심을 통해 전달될 때 아이들의 정서는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고 억압된다. 다양한 정서를 경험하고 적절한 감정 표현이 수용되지 못할 때 생존에 필요한 정서만 느끼거나 본래의 정서를 위장한 이차적 정서로 살아가게 만든다. 불안, 공포, 죄책감, 수치심 등의 핵심적인 정서는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성장의 동력을 가진다. 작은 아들의 단순한 어리석음과 무모해 보이는 현실 감각, 초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둔감함은 지나친 초자아의 발달을 가져온다. 아버지는 ‘때가 되면’ 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다. 아버지 세상의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아버지의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았다. 

작은 아들은 어머니의 부재로 아픈 것이다. 어머니는 장소와 관련이 있다. 모성의 결핍은 사람을 한 곳에 정착시키지 못하고 모성을 찾아 떠돌아다니게 한다. 땅이 없으면 때가 와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장소가 상실되어 그는 장소를 찾아서 떠나야 한다. 그의 결핍은 채워야 비로소 멈추게 된다. 우리는 땅 위에 서서 살아간다. 수용적인 모성을 없는 자들은 모든 것이 두렵거나 두렵지 않거나 어떤 형식으로 살아가지만 구름 위를 걷는다.      

아버지는 그를 교회지기에게 보낸다. 결핍은 교육으로, 훈련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교회지기는 남성집단의 정신을 가르치는 존재다. 남성성은 다양한 단계로 서열을 정하며 거기에 복종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집단의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알려주는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는 자이다. 교회지기는 교회종 치는 일을 작은 아들에게 맡겼다. 교회종이 울리면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음성으로 작은 아들을 교정하고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하였지만 작은 아들의 병이 깊어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계단 위로 올라간 교회지기는 작은 아들이 자신을 유령으로 생각하길 원했다.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은 아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계단으로 상징되는 서열과 초자아로 향하는 단계를 단호히 거부한다. 교회지기는 아버지의 다른 측면이다. 우리는 부모가 아니라 선생님의 얼굴로 아이들을 대할 때가 있다. 엄격한 아버지는 아이에게 지시하고 복종하게 만든다. 그런 아버지 곁에 보호하는 엄마보다 같이 동조하는 엄마가 있어 아이는 의지할 곳을 잃는다. 정직한 아이는 내쳐진다. 허상을 허상이라 말하고 위선을 위선이라 말하는 정직한 아이는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소외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격리된다. 자신에 대한 의심은 왜곡된 시각을 가진 그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지 못하기에 그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작은 아들은 두려움이 없기에 그들에게 저항한다. 

작은 아들의 저항은 이제 다른 국면으로 변하게 된다. 작은 아들은 변하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50탈러라는 자본금을 주는데, 그것은 작은 아들이 받은 아버지의 유산이다. 심리적 유산을 받은 작은 아들은 그의 부족, 마을에서 개인적인 아버지로부터 나와 집단의 부성을 배워야 한다. 부성을 극복하고 소름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집이 아니라 마을을 떠나야 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수치가 되었기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다. 작은 아들은 자신이 가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리고 두 가지, 어디서 왔고, 누구의 아들인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명령과 함께 쫓겨났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른 작은 아들은 죄책감을 갖고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다. 죄책감의 부정적 기능은 실제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나친 처벌을 감내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이방인이 되었고, 아버지가 준 유산 50탈러도 낯선 이에게 주려 한다. 잃을 것이 없는 자는 자신의 소유조차 던져버린다.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간절함

끊임없이 사유하던 작은 아들의 게으름의 시간은 끝났다. 아버지를 떠나 길 위를 걸음으로 그는 자신이 살아갈 땅을 찾아야 한다. 낯선 장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소년이 가지고 있는 돈을 갈취하려고 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어둠을 헤매는 것과 같다. 길 위에서 만난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 한다. 해결되지 않는 욕구를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 보일 때 그들은 원하는 것을 준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소년이 원하는 것을 모른다. 소름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지만 낯선 사람들이 말한 밧줄잡이 딸에게 장가든 일곱 명의 사내들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파괴적인 아니마를 가진 남성들의 죽음은 길 위의 남자들에게나 무섭지, 작은 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무섭지 않아 소름이 끼치지 않는다. 밧줄잡이 딸에게 조종당하는 결혼생활은 사랑과 겸손이 빠진 권력에 대한 의지와 자연과 삶을 지배하려는 여자와 함께 살아 삶의 의미가 비어버린 삶을 소년은 낯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았던 아버지의 집이 그런 집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일곱 명의 남자들이 불쌍하게 생각한 소년은 자신의 모닥불 곁에 두지만 그들은 따뜻함보다 소년의 불길이 더 뜨거워 그마저도 태운다. 때로 연민과 동정은 타인을 더욱 힘겹게 만든다. 소년이 냉정한 인간 혐오에 걸린 자라 그가 피우는 불길은 타인을 위한 온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피운 불은 더 끔찍한 파괴성을 가지게 된다. 아니마를 만나지 않은 불은 소년의 불을 뜨거울 뿐이다. 내면에 인감혐오을 가진 불길은 타인을 태운다. 자신의 노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들은 다시 교수대에 매달아버리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데, 내일의 기분은 알 수 없는 존재. 같이 있지만 공허한 느낌을 주는 존재, 가까이 가면 그의 불길로 내가 타버릴 것만 같은 사람. 그의 호의나 호감, 다정함이 오히려 위협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기가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수대 위에 다시 매달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교수대 위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확실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깥에 존재하는지 내부에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나를 비웃는지, 내가 그를 비웃는지 알지 못한다. 교수대 위의 시체들은 그를 반영하기에 더 화를 낸다. 불안한 사람은 분노로 자신과 타인을 태우는 자이다. 

길 위의 낯선 자는 아침이 되어 주인공을 만나러 왔으나 돈을 받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고 있던 불안의 요소, 분열적인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니 소년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이해받거나 웃음거리가 되기보다 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친밀하게 되기를 두려워한다. 자신은 절대로 공짜로 무엇인가를 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거나 아니면 줄 것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이들에게 애착이란 공포와 같은 재난이다. 길 위의 낯선 자는 소득없이 소년의 곁을 떠났다. 


뒤에서 오는 자

길에서 만난 자는 옆으로 왔으나 이번에는 뒤에서 온 마차꾼을 만나게 된다. 뒤에서 온 마차꾼은 소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마차꾼은 소년이 중얼거린 내용을 묻는다. 중얼거림은 인생의 걸림쇠같이 다른 사람을 붙잡는다. 유독 나에게만 다른 사람들이 잔소리를 하는 것과 같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자들이다. 자신을 향한 소리에 제대로 답할 줄 모르고 자신을 남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그는 정말 알지 못할 수도 있고 무의식에서 내려진 명령에 복종하여 의미없는 말만 중얼거린다. ‘소름이 끼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마차꾼은 ‘바보같은 소리’라고 일축한다. 자신이 하는 말에 무시를 당할 때 아이는 수치심을 느끼고 말을 하면 불리하다는 걸 알게 되면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보통은 여기서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삼키게 된다. 그러나 친절한 마차꾼은 방황하고 있는 소년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존재가 된다. 마차꾼은 나서서 도와주는 자는 아니지만 주저앉히는 사람이 아니다. 말의 방향을 잡아 목표점을 향해 데려다주는 마차꾼은 초월적이고 마법적인 존재가 아니다. 교회지기는 자신이 무엇인가 바꿀 수 있는 대단한 존재처럼 생각하는 자였다면 마차꾼은 소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로의 이동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길 위에서 지친 소년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먼저 데리고 간다. 여관은 여행의 여독을 풀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그곳에는 정보가 교환되는 장소이다. 혼자 고민하고 고립되고 소외된 정신에 새로운 기운을 넣어줄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장소이다. 정보와 여관부인의 연민은 소년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다. 소름이 끼치길 원한다는 소년의 집착으로 여관주인은 정보를 알려준다. 무엇을 원하면 아이들은 터무니없는 행동을 계속하고 기어코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 긍정적인 행동으로 갖지 못하면 부정적인 행동으로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고 부정적 행동은 아이에게 성공한 경험으로 자리잡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긍정적 행동보다 부정적 행동이 훨씬 낫다는 생각으로 고착된다. 그래서 치료과정에서 부정적 행동을 하면 무시하고 긍정적 행동을 할 때만 반응하라고 한다. 쉽지는 않지만.


귀신들린 성

여관에서 귀신들린 성에 대한 정보를 듣고 그 성에서 3일만 지내면 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와의 결혼을 약속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왕은 집단의 규범을 세우고 중요의미를 생성해내는 중심자리에 위치한 자이나 귀신들린 성을 처리하지 못했다. 귀신들린 성은 세상의 논리와 합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소년은 지원하자 왕은 성에 들어가기 위한 도구 3가지를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조건은 생명이 없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년이 요구한 도구들은 불과 갈이기계와 칼이 붙어있는 목공용 작업대 하나를 원했다. 귀신들린 성에서 지내려면 인간의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도구는 마음이 없다. 뜨겁지만 따뜻하고 않고, 사람을 이용해도 불편하지 않은 마음과 쓸데없는 것은 잘라버리는 냉정함이 요구된다. 감정의 차가움은 극단적으로 병적인 형태로 치닫고 온전한 인성의 총체 안으로 동화시키지 못하면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과 함께 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기에 자기만족 가운데 살아간다. 그가 타인과 공감할 때는 자신을 위해서만 그렇다. 그들은 무례하고 파괴적이고 충동적이며 잔인하다. 도구같은 인간이 주변에 너무도 많이 있다. 그들은 서늘하여 곁에 있으면 베인다. 도구들은 무의식이 압도되는 위험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적 도구이다. 왕이기에 소년에게 그런 도구를 건네줄 수 있다. 그가 말한 갈이기계는 훈련을 말한다. 갈이기계는 물건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귀신붙은 성에서 자신을 연마하여야 한다. 재능은 없지만 두려움이라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소년을 연마한 도구가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칼이 붙어있는 목공용 작업대는 정교하게 다듬는 도구이다. 소년이 그곳에서 가지고 들어갈 것들은 그가 알고 싶은 두려움을 찾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이다. 이로써 왕으로서 소년에게 줄 수 있는 도구는 다 주었다. 왕의 딸은 이 모든 과제를 완수해야만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아니마이다.

 첫 번째 밤이 오자 성안에 불을 피우고 계속 중얼거리며 두려움이라는 기술을 배우길 갈망한다. 소년에게 감정은 기술에 불과하다. 전두엽에 문제가 있으면 공감능력이 결여된다. 공감능력은 살아가면서 저절로 체득되는 것이나 다양한 감정을 본 적이 드문 경우에 처했거나 지속적인 학대에 노출되었을 경우에는 감정은 마비되어 자신을 방어하게 된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파괴하겠어.”

간절함을 담은 손길로 불을 휘저었을 때, 12시라는 시간, 어제와 오늘로 바뀌는 그때 나타나는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는 소년의 곁에 있는 불 옆에 앉는다. 추워하는 고양이 두 마리, 그들의 야옹거리는 비명 소리에 소년은 자신의 곁을 내주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고양이에게 소년은 몸을 녹이길 권했다. 그런데 소년의 말투는 전혀 살갑지 않다. 두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행동과 말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는 곁을 내주었고, 말투는 험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행동으로 그를 평가하는지 말투로 그를 평가하는지 생각해보면 분별하기 어려울 경우가 종종 있다. 이중 구속은 상반되는 느낌과 요구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몸을 녹이라는 거친 말과 곁을 내준 배려깊은 행동이 서로 다를 경우에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불안이 고양이로 나타났고 어느 정도  몸을 녹인 고양이는 소년에게 카드놀이를 제안한다. 카드라는 도박은 운에 좌우되는 것이어서 모험에 가깝다. 성공이란 것도 전적으로 제비뽑기에 가까운 것처럼 도박같은 것이다. 어느 것 하나에 운을 걸어야 한다. 카드놀이나 성공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가 만연하고 순진한 열망을 가진 자들은 엄청난 피해를 본다. 인간으로 분화되지 못한 동물 고양이보다 도구를 가진 소년은 그들의 속임수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소년은 고양이의 발을 고정시키고 때리고 죽이고 물속으로 던졌다. 이빨과 발톱은 충동과 본능을 상징한다. 소년에 제일 먼저 나타난 고양이와 개는 그가 어둠 속에 만나는 불안의 형상화이다.

이중 구속의 갈등은 소년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새빨간 쇠사슬을 맨 검은 고양이와 검은 개들이 그의 주위로 수없이 몰려들었다. 어느 것 하나를 선택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불안들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더 강력한 공포로 표현되는 검은 고양이와 검은 개의 공격을 소년은 불쾌하게 생각한다. 불안과 불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동시에 공격성과 분노를 일으킨다. 일상에서 아이는 밀려오는 불안과 공포를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르고, 버둥거리는 등의 원초적인 방어를 한다. 아니면 철회해버리고 만다. 소년의 손에 들린 칼은 불안을 더 강한 불안으로 대처하는 도구가 된다. 불안을 모두 없애버리고 침대에 누웠지만 편하지 않았다. 마차처럼 내달리는 침대 위에서도 소년은 놀라지 않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자학은 편안한 곳, 쉬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다. 어디에 있어도 편안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쉬게 하지 못한다. 문과 문을 정신없이 내닫는 침대처럼 경계를 모르고, 이곳과 저곳,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거리낌도 없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고양이로 상징되는 원초적 불안의 강도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그것을 처리하기에 정신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치게 날카롭고 상처주고 험악하게 군다.

그러나 그것이 친밀감을 표현하는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른다. 유아적 행동인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뿐이다. 그들은 다른 방식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모른다. 사춘기 때 자신의 불안과 욕망이 혼합된 그들의 구애방식을 타인은 알아채지 못한다. 산처럼 짓누르는 침대처럼 그들은 자신을 호되게 다루거나 타인에게도 함부로 대함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두 번째 밤에는 비명소리가 먼저 들렸다. 소년에게 나타난 반쪽짜리 거인은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자 하나로 합쳐진다. 통합되기 전의 모습이 먼저 나타나고 불타오르자 그것들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린 아이에게 어른은 거인의 모습이다. 그들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야 한다. 반쪽만 보이고 소리는 다른 곳에서 울린다. 그것들이 하나로 합치면 아이는 긴장과 갈등과 대결해야 한다. 반쪽 부분이 통으로 보일 때 또 단 불안의 양상이 형성된다. 그들이 원하는 지식, 시체 아홉 구에서 나온 뼈들과 두개골 두 개는 지식의 세계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개인적 부성성을 나타낸다. 부성은 사회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데 교회지기처럼 고압적인 태도는 아이에게 고통을 준다. 고통을 받는 아이는 죽은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죽은 지식은 아이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지식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대한 공감을 갖지 못하고 아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지식은 놀이가 아니다. 인생을 살아 가는데 도움이 되고 자아에서 온전한 자기로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지식이 수단이 되지 않고 목적이 된 사람들은 삶에 공허함을 느낀다.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은 정신을 가지고 내기를 하는 추악한 모습이 바로 뼈를 가지고 놀이하는 사람들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왜 더 많이 사기를 당하고 사기를 치는지를 두 번째 밤이 알려준다. 그들과 함께 하는 날은 사랑이 부족해서 비명을 질렸던 첫날보다 훨씬 피곤한 밤이다. 소년은 그들과 함께 놀고 더 잘 놀기 위해 두개골을 갈이기계에 넣고 둥글게 만들어 준다. 학자들 세계에서의 지식 놀이는 경악스러울 정도 잔인하고 폐쇄적이고 편협하다. 소년은 지식을 습득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아야 하고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그는 지식놀이에 참가하기 위해 그들보다 더 잔혹한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 그들과 다른 의견, 다른 취미를 갖는 것은 그들의 세계에 소속되지 않으면 협박과 위협으로 소년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동지임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다. 협박과 위협의 게임은 교묘하게 죄의식을 유발하고 당하는 사람이나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서로 알고 있으면서 넘어가 준다. ‘살인자가 아니라 살해당한 자가 유죄’인 세계이다. 서로 녹초가 되도록 우스면서 폭행한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소년은 돈을 잃는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들과의 게임은 진다. 생명을 잃은 그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없는 지식으로 가득한 그들을 소년이 이길 수는 없다. 지식이 가득한 좀비를 우리는 이기지 못한다. 그들은 외운 것들만 읊조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런 자들과 함께 생활해 가는 것은 살아있는, 아직은 영혼이 남은 자들이 감당할 한계를 넘어선다. 안다는 것은 도덕적 상식을 넘어서는 행위를 똑바로 보고 그들을 정상인으로 대접하기보다 아픈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그나마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일 것이다. 


열두시가 지나면

시계가 열두시를 치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몰려든 것들은 시계가 오늘과 내일을 가르자 사라진다. 시계는 종교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 우주의 흐름을 담고 있다. 눈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모두 담고 있다. 미래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을 포함한다. 내일이 와서 오늘로 바뀐다면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는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루스처럼 자신의 미래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고야의 사투루스 그림에서 아버지 사투루스는 아들의 머리부터 먹는다. 자식은 미래이다. 자식의 머리를 먹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고를 없애버리고 자신의 미래도 없애버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이미 공포를 느꼈다면 그는 아버지에게 먹힌 자이다. 자신을 주장하거나 관철해야 하려면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내재되어야 한다. 그러나 먹힌 자는 자신의 공격을 사용해야 할 능력을 상실했고 공격의 강약을 조절할 사고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그래서 좀비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다. 자기가 쓸 수 없는 엄청난 공격의 양이 필요할 것이라는 망상에 그는 체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체념은 평온한 잠을 선사한다. 그래서 소년은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바닥에서 자는 것이 편안했다. 다음 날 왕이 왔을 때, 소년은 작업대에 앉아 구슬프게 말한다. 소년이 느끼는 슬픔 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소름의 정체에 대해 순응의 뜻을 비춘다. 체념한 소년의 “아 Ei!”는 그동안 소년이 말했던 “아 Ei!”와 다르다. 

성의 마지막 밤이 되고 소년에게 다시 어둠이 왔을 때, 여섯 명의 거인이 관들 들고 나타났다. 관 속에는 사촌 형제가 누워있었다. 시체같이 죽은  그를 소년은 주무르고 따뜻하게 해서 살려냈지만 시체는 그를 공격했다. 사촌이 살고있는 세계는 암흑의 세계이다. 소년은 그를 살리기 위해 세 번 시도한다. 첫 번째는 불 옆으로 가서 손바닥을 따뜻하게 해서 시체의 얼굴을 감쌌고, 두 번째로 불 옆으로 데리고 와서 주물러주었으며, 세 번째로 시체 곁에 누워 자신의 몸으로 그를 감싸주었다. 자신을 닮은 사람을 살려내려는 그의 수고는 보통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정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내 시체는 도와준 자들을 공격한다. 지금 우리는 그런 세상을 보고 있다. 소년은 그렇게 정성스럽게 살려낸 자가 자신을 공격하자 그를 관에 넣고 뚜껑을 닫아 버렸다. 소년의 냉혹함에 당황스럽지만 소년을 질책할 수 없다. 그는 사촌보다 자기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가 하는 행동은 자기만족이고 상대는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 들여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하려는 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다.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충족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충족된 사람은 상대가 감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내치지 않는다. 분별력이 없는 행동은 판단력까지 흐려지게 만든다. 시체는 살리는 것이 아니다. 에우리디케를 살리려고 갔던 오르페우스는 나중에 8조각으로 찢겨 죽었다. 죽음에 대한 무서움은 소년을 놀랍게 하지 않는다. 


신뢰를 알게 된다

신뢰는 소망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 익숙한 것과 친숙한 것이 되돌아 올 것이라는 신뢰는 법칙성과 혼란을 이해하게 된다. 혼란이 끝나면 질서와 규칙이 올 거라는 믿음은 희망을 갖게 한다. 변화에 대한 불안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려고 하는 강박을 불러온다. 삶은 늘 흐름 속에 있고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는 중이기에 모든 것을 지속시키려는 욕구는 불안을 가져온다. 기억은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데 중요하다. 죽었던 시체를 되살리는 것은 변화된 무엇인가를 되돌리려 하니까 공격을 하는 것이다. 그의 중얼거림은 열쇠의 걸림쇠이다. 그가 변화하려고 할 때마다 걸려있는 장애물은 지속성에 대한 열망이다. 그가 계속 “소름이 끼쳤으면”하고 말하는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입으로만 내놓을 뿐 무의식의 깊은 곳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속된 주문은 소년의 더 깊은 곳에 있던 아주 늙어 보이는 늙은이, 더 커 보이는 노인 길고 하얀 수염을 가진 노인을 불러냈다. 지속과 불멸을 나타내는 노인은 소년을 죽이려고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은 전통을 고수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노인은 대장간으로 소년을 데리고 가서 도끼를 집어 들어 모루를 내려쳐 땅속에 들어가게 했다. 쇠는 광물 중에 가장 단단함을 상징하고 강력한 타나토스를 나타낸다. 노인의 강력한 힘은 모루를 땅속으로 집어넣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 모루는 달구어진 쇠를 올려놓고 연마하는 강력한 받침대이다. 쇠가 도구로 쓰이기 위해 단단하고 강력한 달금질을 하는 받침대인데 그것을 노인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데 쓰였다면 그의 권위가 타인을 압도하여 모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새로운 것의 변형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의 성에는 낡은 것이 귀신처럼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노인은 왕과 대비되고 아버지와 비슷하다. 소년이 왕에게 요구했던 도구들은 대장간에서 쓰던 물건들이다. 대장간의 물건을 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어도 그가 대장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불을 사용하고 쇠를 다스리는 사람의 아들이었기에 그의 분노는 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웠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모이면 왕이 되고, 귀신이 나오는 무시무시한 성을 가지고 있는 왕은 노인처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도 기꺼이 남에게 주어버릴 정도로 이기적인 왕이었다. 예전의 방법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가 없음을 알고 있어,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도 자신의 체제를 바꿀 의지가 없었다. 늙은이의 수염이, 권위가 더 이상 세상에 먹히지 않음에도 그는 자신의 체제를 고수하였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을 귀신이 나오는 성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새로운 힘을 가진 외부의 힘이 오랜 세월 지켜온 구습으로 성을 지키는 자가 박은 모루를 두 쪽으로 가르고 그 사이에 권위를 끼웠다. 노인은 소년이 내려치는 쇠몽둥이에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다. 소년의 겁 없음, 무모함, 그리고 조절할 수 없는 공격성의 양은 엄청났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경직된 불변성이 값을 치러야 했다. 고집스런 거부는 소년의 유아적인 행동으로 맞불을 놓았을 때 항복한다. 그들의 권력이나 의지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경스럽고 경악스러운 어떤 행동을 해야만 그들은 물러선다. 권위는 산산조각이 나야만 비로소 물러선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지양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힘이 있으면서도 함부로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로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대화를 한다. 예의를 차리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호의를 권리로 안다. 소년의 유아적인 행동은 발전하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좀비가 목을 무는 이유는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키기 위해서이다. 사고하는 사람은 육체에 굴복하지 않는다. 

늙은이는 살려달라고 사정하며 그는 보물을 주기로 약속한다. 보물을 받기 위해 그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과거를 정복하면 우리는 보물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거인보다 더 커 보이는 늙은이를 굴복시키는 이전의 소년은 부모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부모의 어리석음과 모순과 부족함을 느끼면, 그들도 다른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서야 어른이 되었음을 느낀다. 나중에 지하실을 빠져나올 때, 소년은 ‘혼자서도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소년에서 남성으로 변화된 것이다. 늙은이가 데리고 갔던 대장간은 복도를 지나는 수평적 이동으로 장소의 변화를 말하지만 보물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적 하강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다스려지지 않았던 분노를 신에 의지하려던 수직적 상승은 실패로 끝났지만 아들의 원인모를 분노는 소년의 여행으로 다른 장소에서 수평적 이동을 했을 때, 그리고 하강했을 때 작은 아들은 자신의 힘으로 보물을 가질 수 있다. 

세 개의 궤짝이 담겨진 보물은 이미 준비되었던 것들이었다. 그것은 성공하는 자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이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 하나는 왕의 것, 하나는 소년의 몫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소년이 그 성으로 가지 않았다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보물이다. 타인을 위한 것과 권위를 위한 것과 자신을 위한 것을 정확하게 배분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문제가 생긴다. 태도가 본질이다. 그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으나 그는 기본적인 연민을 가진 자이고, 귀신들린 성에서 들어갈 담력을 가졌고, 모든 것을 이겨낼 정도의 집요함도 갖추었다. 또한 자신의 문제점을 알고 그것을 끊임없이 사고하는 자로서 보물을 가질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그는 스스로 지하실에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정도로 성장했다. 약속한 아침에 왕이 왔으나 소년은 아직 소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소년이 성을 구했으므로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소름을 알고 싶어했다. 둘은 행복했지만 행복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간격이 메워질 때 발생한다. 소년의 아내가 그의 말에 걱정하자 시녀는 왕궁 정원에 흐르는 물을 양동이에 가득 담아 잉어와 함께 잠자는 젊은 왕의 이불을 걷어내고 그의 몸 위에 뿌렸다. 그때서야 소년은 소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둔감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아니마를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그는 아니마가 생겼으므로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타인과의 소통은 감성적인 부분이므로 아니마가 작동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타인과 대화를 한다고 해서 그들과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타인의 감정도 훈련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같이 느끼는 것, 깊은 공감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알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죽음에 직면했고, 조종당하고 조종했다.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당했다. 어렵게 얻은 공감능력은 세상과의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그는 보물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난 것도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알기 위해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타인과, 권위와, 자신을 위한 보물을 가지게 되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내면에 지니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최고의 진리를 상징한다. 진리는 시간의 흐름에 영향받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이 찾아야 하는 가치이다. 살아가는 동안 내가 찾은 가치는 변화할 수 있으나 온전한 세상이 존재하는 걸 알게 됨으로 세상에 대한 신뢰가 소년은 알게 된 것이다.

그림형제 동화에 ‘여행’이라는 소담이 있다. 그는 새로운 경험을 가지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항상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는다. 여행을 마치고 어머니 집으로 돌아와 그는 다시는 여행을 나서지 않는다. 그가 만났던 남성들이 그에게는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경험은 지속적으로 쌓이고 물려준다. 우리의 체험은 갑작스럽게 순간적이고 충격적인 접촉이다. 잠자고 있던 젊은 왕에게 뿌려진 양동이의 물과 잉어처럼 온몸으로 한꺼번에 체험되는 것이다. 강요된 체험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른들의 경험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에 아이들은 변화되지 않는다. 교회일꾼의 유령놀이는 처참하게 실패하고 밧줄잡이 딸의 일곱 남편도, 성 안에서의 경험도 소년의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러나 공주의 시녀가 가져온 물고기는 뜨거운 젊은 왕의 몸에 뿌려져 잠자는 감각들을 모두 깨웠다. 그의 감각을 덮고 있는 방어기제인 수동공격과 합리화를 치웠을 때 그는 온전히 세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갈등을 충족시키던 그의 행동은 욕구를 지연시키는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노인의 경험이 지혜로 변환될 때 젊은 왕은 보물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과 하강을 통한 경험으로 발견하게 된 소중한 것이다. 지하실 아래로 내려간 무의식의 세계는 억압된 부정적인 것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외면했던 소중한 것도 함께 있다. 정신의 아래층은 보물을 이미 3등분으로 나눠두었다. 여성적인 물질은 정신에 접촉하여 그를 깨어나게 만든다. 무서움이라는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서 여성성을 만나 그는 완성된다. 무의식에 압도되어 중얼거리던 새로운 세계에 젊은 왕이 된다. 개인적인 부성에서 새로운 세상의 부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무서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다른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는 작은 아들은 단편적이었던 흐름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니마를 통해 그가 그토록 알고 싶고 느끼고 싶었던 두려움이라는 감각을 되찾게 된다. 억압되어 의식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망각해야 했던 상처로 인한 고통이다. 통각하는 자아의식이 없이는 역사가 생기지 않고 고통이 없이 자기 정체성은 없다. 

느닷없이 몰려든 능동적인 물은 자신과 객체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그 지점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된다. 자극은 실재하고 기억은 환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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