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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그곳에 원이 있었다.

병사와 세째 딸의 수난(그림형제 동화 곰가죽)

인간의 탈을 쓰고 동물의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동물의 탈을 쓰고 인간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동물같은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호의적이지만 인간답지 않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곰가죽을 쓴 사람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흉측하고 무서워 다가서고 싶지 않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과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자이다. 겉모습만 보고 그들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여 그를 멀리하여 함부로 대한다. 그들은 자신이 곰가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취급을 받아도 아무 말도 못하고 다가서지도 못한다. 그나마 자신들이 가진 것을 주어야 별채 한 구석이나마 쉬게 해주는 여관 주인처럼 우리도 그렇게 그들을 대하고 있다. 그가 주는 것이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서 잠시 곁에 둘 뿐 그에게 그런 능력마저 없다면 우리는 그를 가까이 하지 두지 않을 것이다. 곰가죽은 짐승의 탈을 쓴 고독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나게 하는 동화다.    


1. 어느 날 그가 도착한 곳은 황무지였다.

숲속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의 흙냄새가 이 동화에서 베어있다. 나의 병사는 전쟁이 끝난 뒤 평화를 선포한 왕이 원하는 곳에 가라고 하는 명령에 따라 고향으로 가지만 그의 부모들은 이미 없다. 형제들은 냉혹하게 대했고 그는 갈 곳이 없어졌다. 병사는 인간이 아니라 병기이고 도구였을 뿐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없었다. 치열했던 그는 살기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전쟁에서는 규칙과 규율과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고 적군과 아군만 구별할 수 있었던 단순한 삶이었다.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다양한 것들을 배워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 미래를 향한 전진을 할지, 과거로 퇴행하지를 결정해야 하는 곳은 언제나 황무지같은 곳이다.  

그는 멈추고 자신의 신전 속에 머물렀다. 고리모양의 나무들은 원으로 신전과 같다.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면 고독한 황무지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신의 보호 아래에서 무의식이 대면할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악마와의 만남에서도 그는 영혼을 놓지 않고 그와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개를 가졌다. 또한 그의 야만성이 출몰하여 그에게 다가와도 그는 용감하게 맞선다. 용기란 두려움을 모르는 게 아니다. 두렵지만 전진하고 비굴한 줄 알면서도 잠시 무릎을 꿇는다. 

지나치게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감추고 포장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형체도 없이 압박하였기에 그가 황량한 황무지에서 홀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악마는 고독하고 혼란의 시간 속에서 있는 우리에게 거래를 청한다. 마녀의 집으로 가야 죽지 않는 걸 아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나의 병사는 단 하나 무엇이든 하겠지만 영혼을 파는 것만 아니라는 단서를 달면서 거래를 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파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왜 신을 만나지 않고 악마를 만났을까? 그가 신보다 악마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원이란 각가지로 다면적인 마음의 전체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거기에는 인간과 자연 전체와의 관계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구체이든 원이든 항상 원은 생명의 유일, 지상의 중요한 측면, 생명의 궁극적인 전체성을 가리킨다.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마음의 전체성을 의미한다.

문명 속에서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규율과 규칙이 있다. 병사는 그것과 더불어 명령도 포함된다. 짐승의 세계는 서열이 중요하고 군인의 세계 역시 서열과 명령이 사회규범이나 법보다 우선하는 곳이다. 나의 병사는 결국 악마의 다른 모습이었을 뿐이다. 갈등하는 내적 분열은 마지막 영혼만 남기고 잠시 멈추게 되었다. 염라대왕이 입으라고 말한 곰가죽을 입고 저주와 마법에 의한 금기가 아닌 스스로 계약을 하고 스스로 규칙을 정하여 그것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동화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 나오지만 이렇게 자기 스스로 계약을 하는 이야기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무쇠 난로 속에 갇힌 왕자이거나 마법에 걸린 개구리처럼 엄마에 의한 저주가 아니고 아버지의 저주로 태어나기를 고슴도치인 자들과 다른, 스스로 수련을 받아들인 자이다. 

병사가 보았던 악마는 저승사자이기도 하고 염라대왕이기도 하다. 저승으로 인도하는 자이기도 하고 그곳을 다스리는 자이며 부자이기도 하다. 하계의 하데스는 고독한 자이다. 그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공명정대하기도 하다. 죽음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그에게 자비심이라면 고통없이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 정도일 뿐이다. 사람의 명이 정해지면 그것에 정해진 대로 움직일 뿐이고 천당과 지옥에 갈 자도 적혀있는 대로 할 뿐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자이다. 그는 본능과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자가 아니고 기억과 느낌과 열망을 지하 속에 묻어둔 자이다. 나의 병사가 웃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듯이 악마의 미소도 생각할 수 없다. 그에게는 냉기만 흐를 뿐, 그가 웃는다면 그것은 냉소일 뿐이다. 나의 병사의 세상은 그래서 검정보다는 더 짙은 초록이다. 

병사에게 나타난 자는 소통과 관계의 두절을 요구한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자신의 하계에 있는 마르지 않는 부를 그에게 준다고 말하며 그의 영혼을 가지길 원하다. 신에게 기도하지도 말라는 악마의 말은 어떤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절망의 세상 속에서 희망을 가지지 말고 살아가라는 그 어떤 요구보다 더 잔인한 말이다. 곰을 죽이고 곰가죽을 덮어쓴 나의 병사는 7년의 수련 기간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동화하거나 통찰하는 기간이다. 7이란 숫자는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숫자이다. 

곰은 양면적인 상징을 가진 동물로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고 남성원리와 여성원리를 다 가지고 있다. 그의 흉포함은 세상을 파괴하는 남성적 원리를 나타내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을 가진 여성적 원리를 포함한다. 추운 겨울 동안 인간이 동굴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곰과 함께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동굴 속에 사는 여우, 호랑이, 뱀, 박쥐, 늑대, 곰 중에 사람과 공존할 수 있는 동물이다. 곰은 강함과 인내를 가진 상징적인 동물이면서 미련함과 게으름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곰은 겨울을 나기 위해 비축하는 현명함도 지녔고 건들지만 않으면 그와 공존할 수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악마가 준 초록색 조끼를 안에 입고 곰가죽을 뒤집어 쓴 채로 그는 자기 찾기위해 나선다. 

     

2. 외면과 내면

정신적 외상은 이상하게도 창의력을 높인다. 그들의 상상력은 참으로 놀랍고 그것을 구조하는 능력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본질적인 결핍은 해소되지 않아 그들의 방어기제는 더욱 단단해진다. 악마의 계약을 한 뒤 그의 주머니는 돈이 마르지 않는다. 그는 어둠에 속한다. 감정이 삭제된 채 냉혹한 세상에서 그는 곰처럼 흉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야만적이고 잔인한 승부의 세상에서 안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처음에는 탈을 쓴 자신의 모습을 즐겼다. 자신의 겉모습과 속모습이 서로 다른 것을 알기에 혼란을 겪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정체성의 경계가 모호해져 갔다. 강력한 수컷의 힘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악마가 원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유일한 방법이란 본질이 되는 것뿐이다. 매시간, 매일, 사람들과 어울리든지, 혼자 있든지 내가 입고 있는 곰가죽과 같은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영혼이 잠식당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허구와 현실의 경계까지 모호해진다. 결국 문제는 살아남아 영혼을 지키려는 본연의 모습이 남아 있는냐가 관건이다.

인간에서 짐승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가 가진 것 중의 일부를 주기만 해도 우리는 짐승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모습 중에서 자비심은 무너지는 인간성을 부서지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드러내고 선행을 베풀지 않고 정체성도 모르게 선행을 하면서 곰가죽이 부탁한 것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한 기도를 한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만약 연옥에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바램이 들어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위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 겨자씨만큼 작은 희망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살면서 믿음 하나 가지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 살아온 인생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 단 한번도 진심을 다해 무엇인가를 해본 적이 없는 자들은 불행한 자들이다. 그것이 비록 자신에 대한 이기적인 마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애정 한 스푼을 다른 이에게 줄 때, 어쩌면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죽음의 순간을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재산상의 커다란 손실을 입을 수 있었을 텐데 여차저차해 위기를 모면했을 때, 조금만 저쪽 길로 갔으면 죽었을지도 몰랐는데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들을 살면서 많이 만난다. 그럴 때 자신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란 소리가 저절로 나올 때, 그때가 자신도 모르는 선의의 한 스푼을 받은 누군가 기도해주는 이의 소리를 신이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병사는 그렇게 순간순간을 이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병사의 중심에는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것은 신을 믿는 것.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살면서 가끔은 자신도 모르게 악마의 속삭임에 휘둘릴 때가 있다. 인간이기에 흔들리지만 인간이기에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신의 입김은 추상적이지만 흙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이기에 말이다. 환경에 나를 맞출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환경은 변하고, 변하면 다시 조정한다. 변한다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흐르고 공간은 내가 발로 바꿔서 나가야 한다. 

몸은 모두가 거부하는 곰가죽으로 덮혀 있으나 정신과 마음이 있어 항상 깨어 있있다. 그래서 그는 옆방의 노인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고 노인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사람이라고 말할 상태가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거부했다. 여관주인은 세상 사람들의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자이다. 그에게는 짐승같은 자와의 만남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는 금화 한닢을 받고 그를 받아들이지만 그는 여관주인의 손님이 아니었다. 곰가죽을 쓴 자들이 만나는 자들은 보통은 그런 자들이다. 외면을 보고 판단하는 자들. 그가 가진 자원이 필요할 뿐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곰가죽이 느끼는 고독은 아프다. 그는 신을 부르지도 못할 정도로 황폐한 심리적 상태에 있지만 그의 인내심은 그가 가진 덕목 중에 하나였다. 고독한 자들이 놓치지 않아야 하는  자비과 인내이다. 그들은 간절하게도 소통을 하고 싶지만 다른 자들과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거칠고 투박하여 읽어내지 못한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

흐느끼는 늙은이는 세월만큼 연약하고 가진 것이 없지만 눈과 목소리로 곰가죽의 내면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물질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딸을 세 명이나 데리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여기에서 여관주인의 물질적인 면과 노인의 정신적인 면이 서로 동시에 등장한다. 노인은 물질 말고도 값으로 평가하기 힘든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값으로 평가되는 편리한 세상에서 값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갖는다.


3. 여성성의 수난 

원형이란 원석과 같아서 세공사의 손길에 따라 광물의 가치는 달라진다. 어떤 원석을 가지고 오느냐에 따라 다르게 세공을 할 뿐이지 대리석을 가지고 금을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은 금도 아니고 대리석도 아니고 상아도 아니어서 우리 스스로가 연금술사처럼 자신을 금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드는 이야기가 바로 그림형제이야기에 나오는 곰가죽을 쓴 사나이다. 

병사라는 원형이 나중에는 멋진 사나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여성성이 필요했다. 물론 병사는 자신이 곰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죄를 지을 용기를 내야만 심리적 억제에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 이렇게 해야만 금지된 세상 속에서 한 조각이나마 자기의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오이겐 드레버만의 글에서 두려움 속에서 힘겹게 용기를 내는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그리하여 온갖 제약 속에서 문명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저항을 하면서 발전해 가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공간은 정복했지만 시간은 정복하지 못했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우리는 현재에 있고 미래는 도래하지 않았는데. 미래를 알고 싶어서 별의별 방법을 다 써보지만 현재가 뭐가 달라질까? 있는 곳이 천길 물속이라면 땅을 디딜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누구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림 형제 원본에 곰가죽을 쓴 사나이의 시작은 Es로 시작한다. 이렇게 Es로 시작하면 이야기는 양면으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의 종말은 행복하게 끝났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곰가죽이 그에게 떨어지지 않아서 곰처럼 살아가게 된다. 젊음은 가능성으로 미숙하기 마련이고 병사이니 얼마나 폭력적일까. 동화 속의 전쟁은 심리적 전쟁과 같다. 들끓던 심리적 상황이 끝나고 다른 발달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병사처럼 모든 것을 싸우듯이 살아간다.

악마는 땅 즉, 물질에 속하는 자이다. 병사는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도 없는 사람이어서 악마의 유혹은 쉽게 찾아온다. 그들의 형제들은 심리적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허풍을 떨거나 이성이나 희망은 없고, 수치심도 모르고 무엇이 결여되어 수풀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망치같은 젊은이다. 게다가 빈둥거리고 게으름 부리고 세월을 보내고 무위도식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런 자가 어떻게 멋있게 변신하는지 지켜보자.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참아낼 수 있는지, 괴물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연민을 가지는 여인을 만날 수 있는지에 따라서 그는 멋진 젊은이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기회는 예기치 못한 곳으로부터 온다. 4년이 지나 우연히 들렸던 여관에서 만난 노인에게 베푼 호의는 자신의 아니마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인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들 중 한 명은 그와 혼인하라며 곰가죽을 딸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딸들은 누구도 그와 혼인하려 들지 않았다. 큰딸은 무서워했고 둘째 딸은 비웃었다. 막내딸만이 아버지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한 곰가죽을 받아들었다. 큰 딸은 미숙하고 둘째 딸은 모욕을 주고 셋째 딸은 약속을 지키는 과정은 우리들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4년이란 세월은 외적인격이 형성되는 수련시기이라면 나머지 3년은 아니마의 수련기간이다. 모든 시간은 곰가죽을 덮어쓴 병사가 자기를 찾아가는 수련 기간에 속한다. 반지를 쪼개고 이름을 새기는 것은 누구도 곰가죽과 셋째 딸 사이에 끼어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셋째 딸은 인내하는 동안 미숙함과 모욕감을 견뎌내야 했다. 검은 옷은 주로 사제들이 입는다. 그것은 신에게 자신을 온전히 받쳤다는 것을 말한다. 큰딸의 비웃는 말 속에 ‘손목을 부러뜨리는 것’은 세상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협박과도 같다. 약속을 지키는 자들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하기도 한다. 한입에 먹어버릴 것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은 우리를 삼켜버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게 만든다. 모든 협박과 모멸을 견디며 3년의 수련 기간이 지나가길 셋째 딸은 기다렸다. 


4. 결국에는....

처음에 나타난 악마는 한쪽 다리는 나무로 된 의족을 한 부족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쟁에서도 그는 용감하게 싸웠다고 했지만 악마의 한쪽 다리의 의족은 병사의 부족한 모습을 나타낸다. 생존이 먼저였던 그가 느꼈던 불안은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의지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어려움과 혼란, 계획의 어긋남이 있어도 목표를 향해 갈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그것은 강박적으로 무엇에 매달리는 것과는 다르다. 강박적인 힘은 무의식적으로 개개인을 지배하여 집요하게 원하는 것을 향해 추구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자신의 의지를 향해 나가는 힘이 다른 곳을 향해서 움직이게 한다.

홀로 서 있는 황량한 벌판은 병사의 심리적인 공간이다. 진리란 어떤 사물과 우연한 마주침에 의존한다.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들뢰즈) 우리는 종종 황량한 벌판에 서서 깊은 외로움에 잠겨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장소는 황량한 벌판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은 무의식 아래에 숨죽이고 있는 다양한 원형들을 불러낸다. 때로는 현인을 만나기도 하고, 노파나 마녀 혹은 악마가 나타나기도, 신을 보기도 하지만 병사인 관계로 그에게 나타난 이는 악마였다. 악마가 아니라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의 다른 한쪽은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지 이미 안다. 악마는 그에게 7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세수도 하지 말고, 수염도 깍지말고, 손톱을 자르지도 말고 기도 또한 하지 말라고 말한다. 체면과 권위와 공격성과 신에게 부르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는 많이 있다. 영혼을 팔고 명예를 얻기도 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수련기간이 다 끝났을 때 다시 만난 악마에게 자신을 씻겨달라고 요구했다. 씻는 정화 작업은 그렇게 만든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자기 실현이 다 되었으니 완벽한 페르조나를 가지게 되고 불완전한 아니마들(큰 딸과 둘째 딸)은 제거되는 것이 타당하다. 악마는 특별히 병사의 영혼만을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영혼이라도 상관이 없다. 악마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뿐이었다. 인간은 육신과 마음과 영혼이 있다. 영혼은 도덕적 감정과 관련이 있다. 육신과 마음은 같이 있어 내가 죽으면 같이 사라지지만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 악마가 굳이 가지고 싶어했던 것이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것이다. 

곰가죽은 불안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스로에게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곰처럼 공포를 느끼게 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여진다. 부족했던 여성성이 수련하여 외부에 노출되어야한다. 여성성의 부정적인 모습인 타인을 조롱하거나 협박하는 모습은 제거되어야 한다. 곰가죽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타인에게 나눠주었다. 선의를 가진 자들만이 영혼을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선량하거나 다정한 모습으로 있지는 않다. 우리 또한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것도 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곰가죽같이 본질을 지키면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그림형제식의 위로와 격려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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