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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질척거리는 삶

먹는 것으로 애정을 재지 마라(그림형제 동화 맛있는 죽)

옛이야기의 ‘옛날에’는 남은 것, 시대의 뒤떨어진 것. 물건을 말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사건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뿐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반복되는 그것을 원어로는 einmal로 표현되어 있다. 반복되는 상처들과 계속되는 사건들은 사실은 별것도 아닌데 병인되는 힘과 결합되고 자극에 민감한 시기와 부딪히게 되면 외상으로서의 위력을 가진다. 위력이 계속 유지되어 상황이 변하였으나 금 간 유리창은 갈수록 위험해질 뿐 나아지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마치 정신 속에 이물질처럼 존재하고 이 물질은 한번 침투하면 멈추지 않고 오랫동안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동화는 우리가 가진 상처를 기억하게 하고 당시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자신이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있었을 것 같은 동일시와 투사는 자신의 감정은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직면하면 상처는 아물고 단단한 새로운 살이 돋아나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존재이기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억업되었던(지하실에 숨겨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지금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꿈은 개별적이고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옛이야기는 모두의 꿈같은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다. 공감되고 매력적인 그렇지만 불편하여 피하고 싶어 읽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손이 가게 하는 이야기들은 나와 관련이 있다. 기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는 맛있는 죽에 나오는 소녀처럼, 아니면 그녀의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매번 일어나는 일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옛날이라는 반복된 이야기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옛이야기라는 외피 속에 숨겨진 상징들은 때로는 위안으로 때로는 경고로 다가온다.      

맛있는 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심청이가 떠오른다. 아버지 눈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소녀는 한번만 물속으로 들어갔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신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서 돌아오면 어리석은 아버지는 또 미안해서 그렇다며 다시 일을 저지르고 심청이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당수의 제물이 된다.

그림형제 동화 속의 소녀 중에 맛있는 죽의 소녀도 어머니의 욕망으로 매번 숲으로 들어가야 했을 것이고 그때마다 마법의 도구를 가지고 오지만 소녀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서술형의 그림형제 동화는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지모신을 만나다

영리하고 재능 많고 효성스러운 소녀는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효성스럽다’는 단어는 독일어에서는 frommes라는 단어로 나온다. Frommes라는 단어는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온순한. 악의가 없는, 선의의, 용감한, 부지런한 뜻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 뜻에 독실한 척하는 뜻이 언뜻 지나치는 단어로 함께 나온다. 소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위선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어머니라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장하고 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에 불과했다. 

가난하다는 것은 재물의 궁핍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편협하고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를 받아들이는 수용력도 떨어지고 옹졸하다. 가난이 힘든 이유이고, 가난이 불편한 이유이다. 그들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하다. 세상의 도움을 받는 것도 불편해한다. 두 사람 중에 아직 어려서 유연하고 수동적인 소녀는 숲으로 간다. 어리다는 것은 편견과 옹졸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그녀는 숲으로 들어가서 대모를 만나게 된다. 소녀의 어머니가 숲으로 가지 못하자 그녀가 숲으로 간다. 가난한 어머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걱정만 할 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이다운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는 배가 고픈 욕구에 충실하여 생활 속에 밀려서 숲으로 갔던 것이다.

숲이란 옛이야기에서 무의식의 장소이기도 하고 사람의 무리를 말한다. 숲은 어두운 미지의 영역이고 무서운 생물들이 살고 있지만, 그곳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먹거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숲이 주는 공포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무서운 생물이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다. 세상에 낙오된 자들이 느끼는 사회는 공포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해 낯설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다. 아예 가난이 익숙하다. 그것은 절망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는 자기만족과 게으름의 결과이지만 그것을 알고 있기에 벗어나기 어렵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낯선 장소에 대한 공포와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나이가 들었기에 훨씬 더 많이 알게 된 것일수도 있다. 헨젤과 그레텔이 간 숲은 부모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간 숲이라면 맛있는 죽의 소녀가 간 숲은 자발적인 들어감이었다. 스스로 선택했을 때 마법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반드시. 

항상 힘겹고 배고픈 날이었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날은 어느 날이다. 모든 날이 다 그날이 아니라 더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갔을 때, 우리는 마법을 만나게 된다. 마법이 일어나는 조건은 3가지이다. 사람과 장소와 바로 그, 시간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공간과 시간과 육체가 함께 이동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아이의 모습이어야 한다. 천진함과 순수함을 가진 소녀에게는 욕심이 없었다. 욕심없는 배고픔을 알고 있는 할머니 지모신이 나타났다. 어머니의 자상함과 자연의 엄격함을 가졌지만 원시의 생명력이 가득한 할머니는 아이의 배고픔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모신이 준 것은 마법의 작은 냄비였고, 그 냄비에서는 맛있는 기장죽이 나오게 하였다. 기장이란 식물은 곡물 중에 가장 작고 노란 색깔을 띠고 있다. 노동에 비해서 수확이 적고 주식으로 사용되기는 부족한 음식이지만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하는 음식이다. 또한 기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곡물이다. 소녀는 많은 욕심을 내지 않았고, 할머니도 아이에게는 작은 것을 주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소녀의 것이었다. 소녀는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을 줄도 알았다. 

선물은 신이 주는 뜻밖의 행운이다. 부드럽고 상냥한 소녀에게 물질을 담을 수 있는 수용성과 포용력을 주었다. 물질을 나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어른의 탐욕이 곁들어 있을 때이다. 돈에게는 아무런 인격이 없다. 선도 아니고, 악 또한 아닌 것처럼. 아무런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에 성격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가고 있는 자의 마음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복잡하지가 않다.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하고 단순하다. 그런데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악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선이 하얀 것처럼 악 또한 아무것도 포함되지 않은 검은 색일 뿐이다. 검은 것 또한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것처럼 순수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커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순수한 검정은 감정 또한 섞이지 않고 무엇을 넣어도 변화가 없다. 검정을 없애는 것은 빛뿐이다.      

할머니는 소녀에게 주문을 알려준다. 언어는 바깥 측면이자 다리가 된다. 감정의 소리와 모방의 소리로 배가 고프다고 말하게 되면 맛있는 죽이 나온다. 언어가 없이는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주문이란 그런 것이고 간절함이란 최소한의 단어로 이야기해야 한다. 물질을 담을 수 있는 마법이 생기면 주문을 외워야 한다. 시작과 끝을 명료하고 간결하게 해야 함을 할머니로부터 배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란 지혜를 가진 성인으로 그들은 자식들보다 손녀들에게 무조건적 애정을 나눠주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전수하는 역할을 한다. 성숙한 어른은 중요한 현실적인 지식을 가르쳐주고, 세상과 나의 중간에 서서 신과 나 사이를 중재한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전통을 훈련시키기도 한다. 그녀는 현명하고 초월적인 이상과 일상의 현실을 연결하는 자인 것이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공동의 재산이나 작은 냄비의 소유는 소녀의 것이다. 소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것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힘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도 함께 소유하게 되었다. 소녀가 다시 집으로 갔다고 했을 때,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끝날 수 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녀는 어머니에게 그릇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본다는 지각행위는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알고 있을 뿐 작은 냄비를 조절하거나 통제할 능력을 습득하지 못했다. 절망적인 배고픔을 벗어나고 비참한 생활을 떨쳐내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고 어느 정도 배고픈 삶에서 벗어나자 소녀는 밖으로 외출을 하게 된다. 


어리석고 가난한 엄마

주관적 의식에 사로잡히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어머니는 소녀의 외출로 그릇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소녀가 한 것을 보고 모방을 시도했던 것이다. 소녀의 순수함과 용기와 도덕성(절제)을 가지지 못한 어머니는 애석하게도 그것을 사용해본다. 우둔한 어머니는 아이의 재주를 따라 해보지만 주문을 아는 자는 소녀뿐이었다. 절망과 비탄 속에 숲으로 가서 자연의 현명함을 가지고 온 소녀의 흉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맛있는 죽이 되지 못한다. 어머니는 모든 일은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수용력이 떨어지기에 다른 사람들과 다투고 작은 일에 흥분하게 되고 모든 일을 시시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눌러서 찌부러뜨리기도 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투덜거리게 되었다. 냄비의 죽은 계속 넘쳐나서 그녀의 통제범위를 벗어났고 소녀가 돌아왔을 때는 한 채의 집만 겨우 남아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오지랖은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엄마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오물 같은 애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성숙하지 못한 어머니에게 태어난 딸은 그런 어머니와 함께 계속 지내야 했다. 징징거리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그녀는 싫고 불쾌한 일을 계속 당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린 아이는 완전성의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성인의 경우는 마음의 무의식의 내용과 의식 결합을 통해야만 완전성의 감각을 가질 수 있다. 복종의 시기를 거쳐 억제의 시기를 넘기고 그 뒤에 해방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남자는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소녀와 어머니에게 결핍된 부분은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다. 어머니는 물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면 아버지는 정신을 담당하게 되는데 소녀와 어머니에게 없는 것이 통제와 조절이었다. 

입이란 받아들이고, 머금고, 씹고, 뱉으며, 다무는 다섯 가지 기능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이 기능은 개인이 생활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대처할 때 만들어지는 이후의 적응 방식을 말한다. 맛있는 죽은 먹는 것이므로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을 말한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어머니는 사람과의 관계를 먹을 것을 가지고 소통하려고 한다. 주변에 애정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먹는 것을 통해서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억지로 먹게 하여 불편하게 만든다. 아니면 먹는 것 때문에 사회생활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자신에 대접하는 음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의 바로미터로 사용한다.

이들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먹는 것과 관련이 깊다. 편식을 하는 사람, 음식을 탐하는 사람들은 애정에 대한 결핍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들이다. 탐욕의 끝은 모두 그녀와 함께 하기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먹기 싫은 것도 억지로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녀의 애정을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고 받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녀의 집을 피해서 가야 하고 그녀가 있는 모든 곳은 질척거리고 끈적거리게 된다. 어머니는 이제 불안과 좌절로 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소녀는 또 다른 마법을 가져오기 위해 모험을 떠나야 할 것이다.   

힘겨울 때는 수용적인 척하다가 자신에게 힘이 생기면 용수철처럼 다시 원래의 모습을 보면서 심청이를 생각한 것은 아버지가 먹을 것(쌀)을 구하기 위해 스님에게 되지도 않는 약속을 해버린 것에 분노하여 스스로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청이는 끊임없이 아버지의 허황된 약속을 때문에 몇 번이고 자신의 몸을 팔았을 것이다. 심청이의 엄마는 어리석은 남편으로 아예 아이를 낳자마자 죽어버렸지만 부인을 대신할 수 있는 어린 딸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위해 힘겹게 젖동냥을 했다는 그것으로 인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던 심청이는 어린 시절 너무나 빨리 부모가 되어버려 소녀시절을 가지지 못했다. 심청이를 생각하면 환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생각할 수가 없다. 맛있는 죽의 소녀와 심청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이번 한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끝날 수 없고 끝낼 수 없는 업보같은 생의 반복이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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