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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조화롭게 사는 삶이 파탄났을 때(그림형제 동화 쥐, 새, 소시지)

그림형제 동화는 마치 호두열매를 먹기 위한 수고로움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번거롭다. 지금은 어디에 가서도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호두가 있지만 그림형제의 민담은 오랜 시간을 성찰하게 하여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우리의 호두는 먹기 위해 많은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진실에 다가가는 순간은 푸른 호두처럼 땅속에 숙성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숨어있고 상징을 읽어내면 순수성은 사라지고 세상은 검고 냄새가 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을 가진 것은 상징적인 질서이며 진실을 규명하는 데는 우화가 더 적합한 경우가 있다. 그림형제 민담에서 우화형식은 진실을 알기 위한 숙성기간을 갖는다.


민담의 시계는 유동적이고 등장하는 동물들은 다면적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내 마음의 안과 밖이며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기도 하다. 아직 인간이 되지 않은 존재들은 소소한 일상을 지탱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서막에 나오는 새, 쥐, 소시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지 않았다. 소소한 삶 속에서 서로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 하며 재산을 축적하며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들이 사는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 한집에 모여 있으면서 평온하며 재산까지 축적하며 지내고 있었다. 

우리는 동물의 세계와 신의 세계 속에서 그 어디쯤 존재한다. 인간은 때로는 벌레같은 모습으로 기생하고 동물처럼 본능에 충실하기도 하며 신처럼 자비롭고 때로는 엄격하기도 하다. 인간은 악마처럼 교활하기도 하다. 인간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시작되고 본성보다는 이성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순간에 우린 동물처럼 자기만으로 위해 살아간다. 서로 협력하여야 잠재적 자연의 위험에서 생존할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이기적인 본능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신이 가진 선함에 의지하기도 하고 악이 가진 횡포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경계하며 산다.    

  

아직 인간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동물인 쥐와 새와 소시지는 같은 시간을 보내고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존재하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3은 처음으로 ‘모든’이라는 말이 붙이게 되는 숫자이다. 처음과 중간과 끝을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보편적이면서 강한 결속을 나타나게 하는 숫자이다. 땅(쥐)과 하늘(새)과 그것을 연결하는 소시지로 그들은 전체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낼 수 있었다. 창조와 지속, 파괴, 시작과 유지, 종결의 힘을 가진 이들이 잘 사는 것은 당연했다. 


쥐와 새와 소시지가 승화되지 못한 시간과 공간과 관계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새가 맡은 일은 매일 숲속으로 날아가 땔감을 물고 돌아오는 것이다. 숲에 들어가는 것은 미지의 위험으로 들어가서 의미를 찾아오는 것이고 가장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새는 타인과 만나고 관계를 갖고 새로운 정보를 가져오는 역할을 담당하여 땔감이라는 물질을 가져왔다. 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가 하는 노동은 정신과 육체를 오직 생계만을 위해 하는 행위이다. 매일 세상에 나가 순수한 에너지 공급 재료인 땔감을 가지고 오는 필수적인 행동은 살아가는 동안 벗어날 수가 없다. 에너지는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지식 역시 외부로부터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땔감은 미지의 세계로 나가 획득할 수 있고 그걸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은 자유롭게 외부로 근접할 수 있는 새여야만 한다.      


쥐는 지하와 지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불을 피우고 물을 길어오는 역할을 한다. 지하를 오가는 쥐는 불을 피울 수 있다. 쥐의 부단한 움직임은 삶의 동력을 가져온다. 행위를 하게 하는 힘은 숲에 있지 않고 지하에 있다. 우리의 신체기능은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 분화되어 모순되지 않아야 움직일 수 있다. 새는 필수라면 쥐는 당위다. 쥐는 당위성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노동은 생계를 위해 해야하는 일이지만 작업은 해야하는 것이 맞다의 판단 영역에서 움직인다. 불과 물은 옳고 그름은 판단해야 하는 것이기에 쥐는 지하와 지상을 오가며 수시로 에너지를 물로 불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그것은 쥐여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또한 식탁을 차리는 작업을 쥐가 한다. 짐승이기에 서열이 중요하하다. 그래서 공평하고 균등하게 배분하는 역할은 쥐가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작동 스위치는 쥐처럼 무의식과 의식을 오간다. 불은 숨어있고 물은 대지에서 흐른다. 숨어있는 불을 지피는 것은 쥐만 할 수 있고 흐르는 물은 그여야만 길어올 수 있다. 쥐는 발이 있어야 행동을 할 수 있다. 지식역시 발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가지고 올 수 없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자는 쥐다.     


여기서 소시지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다. 소시지는 현실에 맞는지를 결정해야하는 역할이다. 요리할 때 온갖 재료와 함께 불과 물이 중요하지만 간을 보는 이유처럼 목적을 향해 최종적으로 현실에 맞는지를 알아보고 욕망과 소망과 환락과 환희를 구분할 수 있다면 삶은 풍요롭다. 살아가는 동안 나와 접촉하는 모든 것들 사람과 상황과 사건과 물건들이 현실 속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알고 그것을 조절하는 건 소시지를 소유한 자만이 한다. 자존심인지 자존감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소시지처럼 간을 잘 보아야 알 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수 있는지를 알아채는 것은 소시지가 있어야 가능하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들과 함께 하게 되거나 함께 해야 할 때 소시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만이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데 순조롭게 해나갈 수 있다.      

쥐와 새와 소시지의 분명한 역할분담으로 삶을 멋지고 만족스러우면서 평온하게 살았다. 자유롭게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은 다르며 명예롭게 사는 것은 위험하다. 본능에 따라 사는 자유로운 삶은 지루하다. 지루함 속에 누군가의 들쑤심은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바로 위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눈 위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띈 것,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보여진 것은 그들의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른 단순한 생활은 평화롭고 단조롭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데 쥐와 새와 소시지는 성장하기보다 안주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가지 않은 걸 자랑하고 다녔다. 자랑은 타인의 질투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고 질투심은 내재되어있던 술수꾼을 불러내어 불화를 뿌린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술수꾼은 도처에 존재한다. 평화롭게 살고있는 새에게 ‘여태껏 너는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선한 이유에서 악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이유에서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새는 평온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다른 삶을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새는 관계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타인의 말에 동의하고 납득되었을 때, 그때는 자기 존재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로 높아졌을 때이고 잠재적 위험을 무시하게 된다. 자신이 커지면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는 타인의 행동이 내 안으로 들어와 강제가 아니었음에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게 된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말에 동의했을 경우 삶은 뒤틀어진다.       

   

쥐와 소시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삶을 결정하는 것을 놀이로 정하는 이들은 아직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걸 말한다. 삶은 놀이처럼 즐겨야 하지만 결정은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결정을 내가 내려야 결과에 순응한다. 결정을 누군가에 의지하거나 맡겼을 때 결과를 수용하는 자세가 다르다. 게임으로 정한 삶은 살아내는 것에 취약하다. 결국 그들은 새는 물을 길어오는 일을, 소시지는 땔감을 구해오는 일, 쥐는 요리를 하기로 했다. 동의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결과는 모두에게 나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림 형제는 


Was geschieht?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라고 물었다. 


속박하느냐? 소유하느냐? 인류 공통의 질문이면서 해법이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상황에 속박되는지, 상황을 소유하는지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다. 고통은 실제이며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시지가 새의 역할을 흡수했을 때 미래로 확장되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하지만 소시지는 중간매개자 역할을 소유했기에 미지의 세계에서 땔감을 가져오지 못한다. 소시지가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순간 만나는 낯선 세계는 맛있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가장 먼저 소멸하게 되는 역을 맡게 된다. 촉매제가 없이는 탁월한 삶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냥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소시지가 있어 자유롭거나 명예로운 삶을 향유하게 된다. 비록 명예로운 삶이 위험할지라도 그렇다.  

   

소시지가 없는 시간은 그저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어도 소시지가 가져올 땔감을 기다리는 쥐와 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길은 하늘이 아니다. 낯선 세계는 걸어가지 않고 날아서 가야한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직관력을 가진 자만이 숲에서 땔감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개는 소시지가 길을 갈 때 그가 땔감을 가지고 갈 만한 능력이 없음을 알아챘다. 주인이 없고 가짜 상표의 소시지라고 생각하는 개는 나쁜 짓을 하기 위해 이유를 찾아내는 빈약한 논리를 가지고 새에게 항변한다. 가짜였다고, 그리고 주인이 없기에 먹어버렸다고.  

   

둘만의 생활은 소시지의 부재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소시지의 부재는 과거의 훌륭하고 멋진 삶과는 다르다. 쥐는 야채 냄비 속에 빠져죽고 식탁 앞에 온 새는 사라진 쥐를 찾아 땔감을 뒤지지만 이미 쥐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새의 이상한 행동을 알 수 있다. 잔뜩 쌓인 땔감을 뒤지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새는 예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소시지나 쥐도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새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어리석은 행동은 자신이 쌓은 땔감에 불이 붙어서 집까지 태우기 시작했다. 집이 타기 시작하자 우물로 간 새는 빠져죽고 말았다. 두레박은 물을 옮겨주는 도구이지만 그것이 그를 우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도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도구에 의해 그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야기 속의 쥐와 새와 소시지는 죽지도 않고 좀비처럼 어느 날 다시 나타나 그동안 축적했던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거나 아니면 또다시 그러한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새처럼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자는 누군가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모든 생활을 부정하고 자신의 고집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조언은 필요하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시금 성찰하지 않으면 그들은 죽고 죽는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화는 끔직한 진실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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