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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그래요, 마리아님 전 그 문을 열어 보았어요.

통나무 속의 소녀(그림형제 동화 성모 마리아의 아이)

그림형제 동화 중에 매력적인 이야기가 성모의 아이이다. 너의 고집과 너의 고통은 어린시절 너의 부모가 너를 키울 수 없어서 너를 성모에게 보냈고 그래서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들은 너에게 사랑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자들이었어. 그러니 너무 너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영화 중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맷 데이먼이 계속 해서 로빈 윌리암스에게 지성화를 통해 자신을 강력하게 방어한다. 급기야 로빈의 사생활까지 분석하기에 이르자, 로빈은 화를 낸다. 그러다가 맷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분노로 가득 찬 맷을 끌어안으며 로빈은 말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제야 맷은 로빈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고, 항상 타인과 자신에 대한 분노로 어쩔 줄 모르던 맷은 자신을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성공의 문 앞에서 도망치던 반복된 행동에서 다른 행위를 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성공이라고 하지는 않을지라도 진정한 자신의 행복을 찾기에 이른다. 

동화는 우리의 잘못된 행동, 우리가 항상 느끼는 보이지 않는 죄책감, 그런 것들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거짓말을 하여 황야에 버려지고 넝마를 입고 살아가도 왕비가 되어 최고의 삶을 살지만 죄책감을 외면하여 화형에 처하게 되는 상승과 추락의 굴곡진 삶과 성공의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게 되는 나에 대한 처벌,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공포는 우리가 겪는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이다.


1, 숲의 언저리의 삶과 세살박이 딸

동화는 기본적으로 마음의 대립과 갈등을 나타낸다. 이 소녀의 마음의 대립과 갈등은 존재하면서 작용하기는 하지만 의식의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부모는 있지만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 소녀는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숲의 언저리에 살고 그들은 가난하여 하루하루의 양식을 걱정해야만 했다. 가난한 부모는 세상의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고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야기에서 그들은 부모라는 단어로 나오지 않고 가난한 나무꾼과 부인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자아는 부모로서의 역할보다는 일반적인 직업의 캐릭터로 나와 부모로의 자격이 없었음을 상징한다. 또한 나무꾼은 나무라는 자아를 잘라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자신역시 괴롭히는 남자였다. 가학과 자학이 함께 한 자이다. 아내는 그런 남자를 가진 부인의 역할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은 아이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그런 사람들의 아이로 자라고 있는 어린아이는 태어나서 세 살이 될 때까지 아마도 애정이라고는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불쌍한 아이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의 아이가 항문기에 들어가게 된다. 항문기의 아이는 힘과 질서와 청결에 대해 배우고 신뢰를 형성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때는 기본적인 신뢰와 희망, 불신을 가지게 되거나 모든 것에 철회하기도 하는 시기이며 감정 부적응의 시기가 시작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청결의 압박과 현실요구에 직면하게 되고 본능(이드)로부터 자아가 분리되는 시기이면서 대소변의 배설로 쾌락을 충족시키며 배변훈련을 통해 보상과 처벌로 사회를 배우는 시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는 모든 것을 모으고, 고르고, 분류하고, 지나친 것은 자르고, 부족한 것은 채우는 혼돈, 즉 무질서의 세계이다. 

지능이 급속히 발달하는 시기에 가장 정교한 거짓말을 배우면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시기이도 하고 그것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배우게 된다. 스스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정리되는 시기며, 종속과 수평, 힘 조절 능력에 자기 조절 능력까지 더해 타인까지 조종하고 조절하고 싶어진다. 아직은 미숙한 그들의 거짓말에 어른들의 반응을 통해 아이는 버릴 것과 가질 것을 배우는데 잘못된 어른들의 방식으로 인해 아이는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무의식 아래로 숨기는 기술을 터득하고 용서를 배운다. 또한 이 시기의 아이들은 탐욕스럽다. 정신없이 모으는 편집증적 성향을 어른들은 자신의 잣대로 바라보기에 아이에게 양보를 가르친다. 어른의 가르침으로 아이는 자신의 소유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양보하지 못하는 자신을 나쁜 아이라고 하고 무조건 주는 아이를 착한 아이라고 할 때 아이는 혼란스럽다. 탐욕은 나쁘지만 아이의 고집은 어른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이 시기의 아이를 감당하지 못해 어른들은 결국 진다. 그것이 아이를 어떻게 성장하게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정당하게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술수라는 방법을 선택하고 어른에게 들키면 재수없는 상황이 되고 들키지 않으면 용인되는 반사회적 성향이 형성되기도 한다. 

배변은 자신이 처음으로 보유하게 된 생산물이다. 3살 된 남아가 자신이 싼 변을 치웠을 때 대성통곡을 했다. 자신의 소유물을 엄마가 마음대로 처리한 것에 대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웠던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아이들은 감당하기 힘들다. 웬만한 정서적 성숙을 지닌 부모가 아니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엄격한 훈육과 통제, 보상과 처벌뿐이다.

숲 근처에 사는 아버지는 일만 하여 부재하고 사랑을 주어야 하는 엄마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성모처럼 모든 것을 다해주지만 아이가 바라는 애정을 줄 수 있는 부모는 사라졌다. 최고의 환경에서 훌륭한 훈육을 받게 되지만 이미 아이의 기저에는 자신이 잘못해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왜곡된 사고의 씨앗이 자란다.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사랑, 갈망, 고통, 애도가 자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증오, 분노, 격노와 함께 기저에 싹트게 된다. 이런 감정을 억압하여 자신은 알지 못한다. 자라면서 무의식에 밀어놓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부모가 아닌 타인을 향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된다. 부모의 처벌이 무서워 스스로 금지했던 소망은 최고의 자리가 되어서도 자신을 보호하려 만들어놓은 방어의 댐들은 균열이 생기게 된다. 자신의 행동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 넣어서 타인과의 관계는 계속 불편하다.

어린 시절 해야 하는 거, 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인정에 존재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너무나 많은 욕구의 좌절이 있었다면 어른이 되어서 아이와 나눠 가질 수 없어 이기적인 부모가 된다. 자기 패배적 성격과 고통과 괴로움은 그들의 삶에 구조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성공은 자신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항문기적 성향이 강한 3살박이 아이가 하필이면 여자아이였다. 수용적이며 소극적인 성향을 가졌다. 그렇다면 아이는 공격의 성향은 타인을 향하기보다는 자신을 향한다. 급기야 그녀가 낳은 된 두 명의 아들을 하늘나라에 가게 되고, 마지막 자신의 딸까지 하늘나라로 보내게 된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거짓을 인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모 마리아의 용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았던 세상이 숲이었기에 누구도 신뢰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마저 믿을 수 없었다.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는 신성함이다.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흠 한점 없는 완전함과 완결함, 그리고 순수의 표상이므로 인간이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완벽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랬을 경우 우리는 한 번의 실수에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녀가 나를 버릴 것이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함께 싹트는 반역의 징조를 함께 가지게 된다.    

 

2. 성모 마리아는 14세에 떠났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어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곁을 떠나야 한다. 아이가 14세가 되면 세상을 향해서 나가게 된다. 이때 아이에게 중요한 과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이야기에서 소녀의 이름이 없다. 세상의 모든 초자아의 아이들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선하고 좋은 것뿐만 아니라 슬픔과 고통, 좌절과 아픔도 함께 자신만의 물결을 만들어 낸다. 아이는 이제 자신만의 물결을 만들어야 하기에 부모들은 그동안 자신이 그동안 양육했던 것들이 아이의 배경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시기가 도래했기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환경을 벗어나게 된다. 성모는 훌륭한 어머니였기에 아이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긴 여행을 떠났다. 

아이는 구강기에 애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항문기에는 철저한 훈육을 거쳤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내는 엄마의 역할을 철저히 했기에 아이의 환경은 최고로 되었다. 달콤한 케이크와 향긋한 우유와 금으로 된 옷을 입고 아기천사들과 놀았다. 달콤한 케이크는 생명과 지식과 에너지와 애정의 다른 표현이다. 좋은 말과 정제된 행동, 완벽한 자아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이야기 속에 별들로 엮은 관을 쓴 부인이 주는 아늑하고 보호된 환경 속에서 마치 황금궁전의 공주처럼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해주었던 행동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황금궁전의 공주는 아버지가 왕이어서 공주였지만 이 아이는 대모의 손에서 자기 것이 아닌 것들을 받았다. 비극이다. 자기 것처럼 사용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을 지니게 된다. 받은 사랑에 대해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으면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다른 것들을 훔쳐보게 된다. 본질적인 결핍은 그녀를 병적인 상황으로 나가게 한다. 병증은 있으나 병인을 찾지 못해서 자꾸 재발되는 이유는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인정하면서 자신의 죄를 낮추는 죄까지 짓게 된다. 그것들이 보기에는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강박반복이 되어버리는 소인이 된다. ‘유리병 속의 혼령’에 나오는 소년은 자신의 나무에 가서 나무의 뿌리를 덮고 있는 잔가지와 낙엽을 치워야 한다. 그러나 이 소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병 속의 마신에 나오는 소년은 아버지가 열심히 했지만 가난했다는 전제조건이 있었지만, 성모의 아이는 열심히 하는 아버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걱정과 근심만 하는 불안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가진 딸이었기에 자신의 뿌리를 찾기보다는 궁핍한 환경에서 최고의 환경으로 변했을 때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야기의 제목은 Marienkind였다. 사전을 찾아보면 반항적인 고집 센 여자, 성모의 아이, 하느님 맙소사(놀라움과 경탄의 감탄사), 늦여름 공중에 떠있는 거미줄(민간 신앙에서는 이 거미줄이 마리아의 혼령이라고 한다)이 나온다. 늦여름 공중에 떠있는 거미줄은 아이의 몸에 감싸고 있는 것은 마리아의 혼령이다. 성모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아이들을 3명이나 희생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을 갖는다. 그녀의 회개는 자신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숲의 언저리에 살고 있는 부모를 가진 아이였다. 그 아이가 소녀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다양하고 아직은 가능성이 많은 활화산과 같은 잠재된 에너지 덩어리인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13개의 열쇠를 주면서 모든 문을 열어볼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은 단 한 개의 방, 작은 열쇠도 함께 준다. 그것은 금지의 방이다. 13이란 수는 12의 중심을 잡는다. 짝수는 공간을 의미하며 홀수는 시간을 나타낸다. 공간은 배경이 되고 시간은 변화를 의미한다. 12라는 숫자는 신데렐라에서 몇 번이고 다시 그녀의 집으로 가야하는 것처럼 밖으로 드러나 있고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땅이 12시라고 해도 13이 되어야 새로운 시작된다. 13은 보이지 않는 기본 바탕의 수이다. 13은 만물이 구체적 형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온전한 음양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소녀에게는 충격적인 어떤 것이다.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의 도래에 성모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지만 근원적인 문제가 기저에 깔린 소녀는 이물질처럼 무엇인가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다른 것들을 보면서 느꼈던 많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은 금지된 유혹을 더욱 갈망하게 만든다. 호기심은 커졌고 아기천사로 나타나는 양심과 도덕이 잠시 없는 사이에 13번째의 문을 열었다. 금기란 깨어지면 안 되지만 언제나 금기를 깨뜨리고 그것을 만회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그렇지만 금지된 것을 어겼을 경우에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하다. 단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또 다시 실수를 한다면 그동안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우리는 낙인찍히고 만다. 

13번째의 문은 확대된 초자아이고 그것을 본 인간인 우리는 타죽는다. 신의 탈을 쓴 악은 더욱 강렬해서 거부할 힘을 잃어버린다. 악이 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누가 그것을 건드릴 수 있을까? 악의 탈을 쓴 것들은 훨씬 유혹적이다. 12개의 상징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13개는 12개의 넘침으로 오염이 될 확률이 높다. 6과 6 사이의 하나는 넘치는 어떤 것이다. 어떤 하나의 중심에는 내가 서있고,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신은 우리에게 항상 13개의 열쇠를 건네준다. 13은 땅의 시간, 변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선택이란 인간이 가진 운명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금기를 어길 것인가, 아니면 순종할 것인가. 금기를 어기면 그것에 대한 대가는 분명하다. 그러나 순종하면 그것에 대한 대가도 있다. 인간은 그것을 선택하고 책임도 자신의 몫이 된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처럼 소녀도 현재의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어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랬을 경우 아기천사는 어디론가 가고 없고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버린다. 성모가 생각했던 미래와는 다른 이야기의 전개가 펼쳐진다. 

보호가 지나치면 벽이 된다. 그것이 자신이 쌓은 벽이든 남이 쌓아 준 벽이든 결국은 보호는 벽과 같이 되어버린다. 자신만이 그 벽을 열수 있고, 마리아는 그녀에게 열쇠를 주었다. 열쇠는 자신이 가지고 있고 문은 언제나 자신이 열수 있다. 문이란 닫으면 벽이 되고 열면 문이 되기에 내가 주체가 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놀란 소녀의 가슴은 뛰었다고 했다. 손가락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살짝만 만져도, 조금만 보아도 흔적이 남는다. 죄의 흔적 말이다.  

마리아가 돌아와 묻는다. 문을 열었느냐. 소녀는 자기의 문을 닫았다. 아니요. 고집이 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어쩌면 자신은 문을 열었는지조차 아이는 모를 수 있다. 마리아는 매 순간 소녀에게 온힘을 다해 묻는다. 열었느냐고, 어떤 내적인 곤경들은 너무나 사적이어서 부모의 어떤 공감적이고 지각력있는 돌봄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상태들을 표현하기 보다는 보존해버린다. 내재되었던 두려움을 거부하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상실되었지만 가슴이 왜 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성모는 세 번의 기회를 주고 세 번의 반성할 기회를 소녀는 놓친다. 나중에는 그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가면서까지 세 번의 기회를 주었고 그녀는 그때마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세 번의 반복은 숫자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반복을 의미한다. 세 번의 반복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뭔가 다른 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그로인한 우리의 노력은 항상 원하는 대로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무엇인가는 괘도의 수정을 받아들이는 힘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격을 잃은 소녀를 마리아는 천상에서 쫓아냈다. 라푼첼의 엄마 고텔이 라푼첼의 머리채를 자르고 성 밖으로 쫓겨나 황무지로 갔듯이 성모의 아이는  황야로 내쳐졌다. 우리는 마녀 고텔이 아닌 성모 마리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가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성모를 믿지 못한다. 3살 때부터 그녀는 신뢰를 잊은 채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황금 손가락은 만나는 사람마다 찔렀다. 사물과 사람의 단점만 정확하게 찔러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황금 손가락은 금지된 13번째 방문을 열어서 가지게 된 무서운 형벌이다. 그들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편집증적으로 사람을 보고 모든 것에 음모론을 펼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능력처럼 보이지만 그런 사람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다. 황금 손가락과 거짓말을 하는 소녀가 사는 곳은 당연히 황야처럼 황량하다. 엄청난 죄책감을 억압시킨 상태가 잠에 빠진 것으로 표현되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 소녀가 만나는 환경은 쓸쓸함과 거친 또 다른 무의식의 세계이다. 이제 그녀는 사람으로 밀집된 숲을 떠나서 사람들의 외면으로 황폐화된 세상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숲이나 황야나 무의식의 세계는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3. 황폐한 황야에서

그러나 황야는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해주는 길이다. 인생을 길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끊임없이 걷는다. 자주 길을 잃기도 하고 멈춰서 방향을 잡지 못하기도 한다. 목적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지독한 고립 속에서 그녀가 느끼는 감각은 통각뿐이다. 자신을 찌르는 가시덤불 속에서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프다. 정신의 휴식과 지각, 생각과 연상활동의 결여로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이러한 불쾌한 느낌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천상에서 쫓겨난 소녀는 행복도, 불행도 없는 상태로 들어가서 지극히 내밀한 비밀로 울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몸은 아픔을 표현하는 증상이 있다. 병인을 찾을 수가 없지만 증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녀가 만나는 모든 환경은 가시밭이고 과거만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있는 곳은 황야임에도 하늘나라에서의 삶만 생각한다. 소녀는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에만 매달려있다. 과거는 기억 속에 있고, 현재는 이해되지 않고 미래는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녀의 가슴이 쓰렸고 눈물이 났다고 하지만 그녀는 아마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을 것이다. 화가 나거나 두려우면 분별이 없어진다는 말을 눈을 감았다는 표현을 통해서 나타냈다. 자신에게 감정을 일으켰던 생각들만이 남았다. 정신적 고통은 흥분을 호흡곤란과 분비활동 즉 목이 메인 흐느낌과 눈물을 통해 방출시키면 격앙을 줄이고 마음을 가라앉히지만 우리의 소녀는 눈물도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을 가슴 속에 넣었고 억압시켰다.

그녀가 잘 곳은 고목 속이었다. 동굴과 속이 빈 통나무 안은 심리적 공허감을 의미한다. 그녀의 몸은 피동적으로 움직이고 마음은 피폐해져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하지 못하고 주위환경과의 접촉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를 식물성후퇴라고 하는데 위험한 현실상황에 직면했을 때 유아적 행동으로 퇴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너무나 외로웠기에 그녀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만나고 다닌다. 그런 상태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래도 외롭고 공허해서 식물뿌리와 야생 딸기같은 거칠고 딱딱한 사람이라도 만나야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속이 빈 고목은 심리적 자폐와 같다. 그녀는 나무속으로 숨어서 생의 에너지를 말라붙게 만들었고 항상 사랑을 구걸하는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그녀가 얻어오는 것은 언제나 마른 열매, 말라비틀어진 사랑만을 가지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녀가 있는 곳이 황야인 것처럼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황야에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야처럼 거칠고 성마른 아이로 살아가게 된다.

옷이란 상징에서 자아를 말한다. 그녀의 자아는 넝마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것마저 낡아서 맨살이 드러날 정도로 처참해졌다. 그것은 그녀의 방어기제를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가엾게도 그녀는 험담이나 수다나 소문 등을 몰고 다니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황금 손가락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찔러대는, 트집만 잡는 사람은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있고 죄책감으로 이미 더러워지고 오물이 붙었다. 그런 황금 손가락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만나도 공허하고 애정을 먹어도 내적인 소멸에서 오는 정신적인 고통을 달랠 수가 없다. 그녀가 밖에 나올 때는 따뜻한 태양과 같은 환경이거나 사람을 만날 때뿐이고 그나마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소녀는 절망하고 누구와 있어도 무엇을 해도 그녀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없다. 

황무지같은 그녀의 땅에도 어김없이 계절은 순환된다. 가을이 와도 열매는 맺히지 않아 겨울을 지낼 수 있는 먹거리를 비축할 수 없었다. 그녀의 환경은 항상 겨울처럼 춥고 힘들뿐이다. 사랑이 없는 버림받은 사람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의 순수한 영적 고양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하계의 쓰라린 침묵만이 소녀를 감싸고 소녀의 겨울같은 시간은 흘렀다. 자아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와 직면하게 될 시간이 오기는 할 것인가. 동화 속의 남자들은 자신들 스스로 집을 나서서 다른 환경들과 접하게 되는데 주로 여자들은 타인의 의해 집 밖으로 나가게 된다. 자발적인 모험과 타율적인 모험은 세상을 대하는 방법과 같다.

4. 지구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

숲이 다시 신록으로 뒤덮인 어느 날, 분명 소녀가 있던 곳은 황야라고 했는데 장면은 숲이라고 했다. 서러운 시간, 겨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그녀에게 어느 날이 왔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모인 그 날은 분명히 온다. 소녀가 해방될 날이 도래했음을 의미하고 신록으로 덮인 세상은 새로운 세상을 왔음을 말한다.

소녀의 세상으로 왕을 인도한 것은 사슴이었다. 사슴은 초식동물이기에 움직이는 것을 보면 무조건 도망친다. 사슴은 소녀의 다른 모습이었다. 왕은 칼을 든 자로 세속적인 권력을 의미하지만 남성의 원리를 나타낸다. 왕의 모습을 보고 소녀가 달아나는 것을 통해 그녀의 공포를 엿볼 수 있다.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자들을 피하고 그녀가 다가가면 사람들은 도망친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패했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칼이 상징하는 해방보다 칼이 주는 공포에 두려움을 느낀다. 왕이 덤불을 헤치고 다시 말해  소녀의 방어기제들을 걷어내어 보니 나무 아래에 황금머리카락으로 온 몸을 가린 아름다운 소녀를 발견했다.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왕이 그녀에게 느끼는 호감은 성적인 매력이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게다가 연약하기까지 한 소녀를 보호하고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한 왕은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냐고, 소녀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굳어버린 혀와 닫힌 입술로는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한다. 남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 말을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 의존성과 비판적이고 성에 대한 공포, 자기의심, 수동성, 인내심의 결여는 구강기적 성격이지만 소녀가 버려진 시기는 항문기였다면 구강기 때부터 소녀의 자아는 이미 손상된 상태였다. 나이는 들어가지만 상처 난 곳을 그냥 두고 다른 부분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분명히 그 부분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들은 상처 난 곳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자리가 나타난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은 치료는 항상 일어나게 된다. 원인은 의자의 살짝 삐져나오 못처럼 언제나 편하게 앉으려고 할 때 엉덩이를 찌르고 옷을 망가뜨린다. 조건이 주어지면 발생하는 것이다. 삐져나온 못은 빼든 지, 아니면 망치로 쳐버려야 한다. 잠복되어 있는 어떤 것이란 그런 것이다.

왕은 메시아처럼 버림받은 소녀를 말에 태워 자신의 성으로 데리고 간다. 왕이지만 사슴을 쫓아가는 미숙한 왕이기에 그도 나중에 자신의 아니마와 어린 자아들을 잃어버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왕은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이 끌려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그녀의 여성성은 황야처럼 메마르다. 여자를 땅으로 비유하는데 그녀는 포용력과 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왕은 알지 못했다. 사슴이란 초식동물이지만 동물이고, 아직 인간으로 분화되지 못한 상태이기에 길들이고 정복하고 싶은 남성들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런 여자들은 생산력, 물론 자식을 낳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생산하고 파생시키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이유로 즉 성적 매력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남자들이 결혼을 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여기서 칼을 든 왕과 도끼를 든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녀가 도망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본질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환경이라는 것은 본질의 문제점을 장점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숲의 근처에 살았다면, 왕은 권력을 가진 자로서 부와 힘을 지녔고 자신의 성을 가졌다. 또한 칼을 가진 자로써 보호할 수 있는 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난한 나무꾼의 아내였지만 그녀는 왕비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의 부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한 자신의 어머니처럼 성모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빼앗기게 된다. 성모와 소녀의 엄마는 같은 사람이나 다르다. 엄마역할을 하는 자는 대리모일 뿐이기에 그녀는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아버지가 주었지만 왕비의 아이들은 왕비의 문제로 내어주게 된다. 같지만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다르다. 왕비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왕비의 아이들은 성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아이들은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성모는 보여주었다. 자유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험해보고 한계를 아는 것을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은 한계를 발견해서 자신의 한계와 함께 가는 사람이고 자신의 한계에 구속되지 않는다. 자유는 한계, 막힘, 제약과 직면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갈 수 있는 것을 결정짓는 것이다. 무조건의 자유를 꿈꾸는 자는 관념적이거나 유치하거나 어리석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세 가지 큰일을 하는 자로 의미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없는 곳에 희망을 주입하고 정의가 없는 곳에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하는 자이다. 

나의 소녀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그녀는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서 여성으로써의 삶에 대한 기쁨과 영광을 박탈당한 자였다. 그녀의 세상은 지옥이고 야만의 세상이고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진 그곳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리하여 세상에 새롭게 나온 그녀의 자식들을 세 번이나 빼앗기고 또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식인종이라고 하면서 그녀를 죽이라고 소리 높인다. 왕비를 사랑하는 왕도 별수 없이 그녀를 죽이는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왕이 자신의 아버지와 무조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모는 왕비에게 의지를 묻는다. 너는 그곳에서 나오겠느냐고, 너의 죄를 인정하겠느냐고, 습관은 의지보다 힘이 세다. 억압하는 힘은 자아를 분열시켜 버린다. 억압당하던 습관이 그녀의 의지를 꺾었다. 그녀의 모습은 괴물처럼 보였다. 자신의 욕망으로 아이들을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여인의 모습은 괴물과 같다. 

아이들이 무사함을 보고 기뻐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다. 증오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누구일까, 그녀가 증오하는 자는. 아마도 엄마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버림받게 했던 사람,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던 엄마,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사랑을 받고 싶었던 따뜻한 젖가슴을 가졌던 엄마에 대한 증오로 그녀의 가슴은 누구보다도 차갑고 딱딱하다. 또한 줄 수 있는데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가슴으로 그녀는 가슴이 메어졌던 어린 시절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왕비지만 자신이 왕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직도 누더기 옷을 걸치고 황야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보다 좋은 엄마인데도 스스로는 형편없는 엄마로 생각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세상 사람들의 질책은 다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아우성이다. 남편은 그녀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급기야 자신이 만든 장작더미 위에 올라서고 만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를 태우려고 할 때 그녀는 마음속에서 소리친다. 아,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

깊은 곳이 녹아들면, 왕이 사랑으로 그녀에게 화를 내고 그 화가 질책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때, 뜨거운 것을 당할 때, 그녀를 잡고 있던 증오와 죄책감은 녹아진다. 좋은 남편을 만나 계속해서 사랑스런 자신의 자아가 나와도 엎어버리던 그녀가 스스로 견딜 수 없게 되어서 스스로 나와야 했다. 자율성을 가져야만 진정으로 뉘우칠 수 있다.  계속해서 ‘아니요’라고 말했던 그녀는 이제 ‘그래요’. ‘Nein’에서 ‘Ja’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름이 없는 내가 아니라는 부정의 단어가 아니라 나라고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 것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부정하였지만, 그것이 왕비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너무나 힘겨웠다. 한 번의 버림과 한 번의 잘못은 우여곡절을 만들어 옷이 벗겨지고 소문의 중심에 서고 사슴이 되었다가 왕비가 되고 그러다가 자식을 먹어치웠다고 하는 괴물까지 되었지만 그 모든 것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소녀에서 진정한 왕비가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5, 그리하여 왕비는 행복하게 살았다.

이야기의 결말은 왕과 행복하게 살았다가 아니라 왕비의 굳은 혀가 풀리고 남은 평생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녀의 행운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녀의 삶이 부모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자신의 삶을 파괴하게 된다는 점. 자아가 형성되기도 전에 초자아가 만들어져 왕비의 삶을 극단적으로까지 치닫게 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잘해도, 성모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인간인 이상 우리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만회하는 동안에 생기는 삶의 결이 결국은 나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프로이트는 이미 내면화된 부모에 대한 혐오와 복수가 대상과의 관계 및 에로스와 리비도의 결합 형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아이는 세 살 때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시기에 아버지에 대한 실망으로 어머니에 대한 애착으로 돌아섰다는 말이다. 발달 시기에 아버지를 향한 애정이 좌절되면 초자아나 죄의식이 심하게 왜곡된다. 14살 때 개인이 취하는 성태도가 결정되어야 하는 시기에 세 살 때 훼손된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그녀는 그로 인해 13번째의 방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괴물로 보게 되었다. 과도한 자기 통제를 하게 만든 부모들의 문제가 고스란히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엄한 아버지가 없다면 아이의 성정체감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프로이트) 

과도한 사랑도, 결핍된 사랑도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치유될 수 있다는 그림 형제 식의 해피엔딩이다. 동화를 읽으면 어떤 부모를 만나도 우리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난해서, 부자여서, 아버지라서, 나무꾼이라서, 농부라서, 재봉사라서, 병사라서, 왕이라서, 방앗간 집 딸이라서, 아이라서 어른이라서. 도대체 어떤 상태가 건강한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어려서, 젊은이라서, 밤이라서, 낮이라서,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어떤 상처를 가졌어도 우리는 다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고, 너의 고통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라는 것. 지금도 과정을 거치는 중이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한다. 잘 묻는 말이 있다. 늦었다. 3분 뒤에 전철이 온다. 당신은 지금 그곳에 도착하려면 4분 정도 걸릴 것이다. 이때 당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에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우리는 가치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인물이나 사건으로 표현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절망과 희망, 고난의 극복방법을 담고 있는 특정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주어진 옛이야기는 우리의 외부생활과는 어쩌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는 모른다. 그려나 우리의 내적 문제와 관련되어있고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통찰하는 어떤 것으로 인해 하나의 매듭이 저절로 풀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답은 뛰지 않아도 괜찮다. 뛰어도 괜찮다. 어떤 것을 해도 다 괜찮다. 동화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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