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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맥주를 끓이는 이와 벼룩

불안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넘겨져서 완전히 다른 부분에서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실제의 불안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 모른다. 현상들 뒤에 있는 관계들을 인식하고 항상 모든 문맥을 주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바닥을 알 수 있는 깊은 곳으로 인도된다. 그것이 아주 작은 어떤 것에서부터 기인되었는지 알기만 해도 불안은 해소된다.

불안은 서서히 경험되고 관계를 맺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된다. 흔적은 내면화되고 타인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태도나 반응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중요한 사람과 사물의 상호관계는 나의 안전감과 인식을 결정하고 우리의 행동을 동기지어 주는 역동성을 결정하게 만든다. 

내가 갖는 좋은 느낌은 자기에 대한 좋은 느낌으로 점차 발전해 간다. 좋은 느낌은 좋은 어머니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태도나 반응은 한 가지만으로 표현되거나 수용되지 않는다. 대상은 나를 포함하여 나와 관계가진 모든 사람과 사물, 환경, 분위기까지 포함하며 본능의 만족이라는 목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벼룩은 그런 대상들과 함께 나의 문제를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직접적인 형상화된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왜 맥주를 달걀껍데기에 끓이는가

아주 작은 사건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확대되고 확장되어 간다. 가장 보잘것없는 벌레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와 벼룩은 한집에 살았다. 기생하는 이는 사람을 숙주로 삼는다. 어린 시절 우리는 벌레처럼 숙주에게 기생하였다. 숙주를 자주 옮기지 않는 벌레인 이와 같이 살고 있는 벼룩은 이동할 수 있음에도 같이 살고 있다. 이는 의존해야 하는 자로 숙주를 떠나지 못한다. 

성장하여 떠나야 하는 시기를 놓친 의존적인 자들의 삶은 언제나 반복되고 항상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는 한 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벌레를 죽이는 꿈을 꾼 사람을 만났다. 발전하지 않는 근거없는 생각들, 실패를 되새기는 습관화된 걱정과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밝은 햇빛 앞에서 이를 잡던 디오게네스처럼  잡아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성의 빛이 비춰주지 않으면 비합리적인 생각은 어둠 속을 기어 다니며 우리를 괴롭힌다. 습관화된 근심과 불안은 낡은 실타래처럼 엉켜 다른 사고로 넘어가지 못하게 우리의 생각을 묶는다. 생각이 사고가 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 불안에 묶인 정신은 몸을 지배한다. 

문제는 언제나 ‘어느 날’이다. 그날은 한 번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날이 아니다. 모든 경험의 소산물이며 이와 벼룩같은 자들에게 떠날 시간을 말한다. 그런 날이 왔을 때 하필이면 이가 몸을 데었다.  

달걀 껍데기 속에 맥주를 빚던 이는 끓는 맥주 속에 빠져 온몸을 데었다. 달걀 껍데기는 근원적인 생명을 보호하는 집과 같은 곳이다. 집은 구성원들을 보호와 휴식과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다. 최소한의 소유와 소중한 것을 보관할 수 있고 타인들과 접촉하고 세상과 교류할 에너지를 얻는 장소이다. 사랑을 하고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곳이다. 세상일을 마치고 세상으로부터 다친 상처들을 보듬어주고 보듬을 수 있는 공간이며 자유로운 생각과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맥주는 온몸에 퍼진 긴장을 완화해주고 새로운 활력을 넣어주는 차가운 음료이며 일을 마친 서민의 술이다. 그것은 온몸을 순환하며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시켜준다. 보리를 싹을 틔워 맥아를 만들고 홉을 더해 끓이고 효모를 넣어 발효시키며 저온에서 숙성시킨다. 이는 달걀 껍데기에 맥주를 빚는다. 이는 비합리적인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감정은 논리를 이긴다. 달걀 껍데기는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에는 깨져야 하는 낡은 집이다. 자아의 발달은 필수적이고 우리는 처음으로 가진 허술하고 낡은 집, 모성과 멀어져야 한다. 그로 인해 의식의 세계에서 길을 잃는다. 우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원시적이고 저급한 모습을 한 이는 새로운 발전하기 위해 깨져야 하는 집을 붙잡고 자신의 일상을 바치면 온갖 노력을 한다. 분리하지 않으려는 뜨거운 노력은 자립을 거부하는 몸부림이다. 우리가 내리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99%는 감각과 감정이 좌우한다. 

데인 이를 보고 벼룩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비명을 지른다. 고통받는 존재와 자기가 객관화가 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너와 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타자의 무의식 혹은 집단 무의식 속에 빠져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벼룩 역시 내면의 이와 같다. 공감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함이지 그것으로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공간에 산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면 그들의 관계는 종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비합리적인 사고는 타인의 삶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왜곡된 시각을 갖는다. 자신의 방어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벼룩의 비명은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논리적인 구조를 해석하는 과정에 오류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벼룩은 이의 화상이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같이 동조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 집에 살고있는 이와 벼룩은 서로에게 안전함과 자기 인식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벼룩의 행동을 동기지어주기도 한다. 사건에 대한 왜곡된 생각은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부분에 초점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타인과 관계맺는 역할을 담당한다. 자아가 있는 그대로 세계와 접촉시키는 것이지만 자아의 왜곡된 사고는 잘못된 행동을 유발한다. 리비도가 어떤 대상에게 집중되면 개인의 인생에 커다란 심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본능적 충동의 힘은 이와 벼룩의 행동을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감정적 통제가 속임수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움직인다.

 둘이 살고 있는 곳에 문짝이 있다. 문짝은 세상과 자아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 사물의 등장으로 이와 벼룩의 현실관계의 확장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문은 자아가 넘어가는 턱이며 의식의 성장과 안정화를 위해서 넘어야 하는 관문이다. 진단도구 HTP에서 문은 생각과 사고의 출구이면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 입구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이 오가며 타인과 교류하는 도구이다. 타인과 세상을 향하며 주체의 의지를 표현하는 도구이다.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열지 않을 것인가? 문짝은 삐걱거리며 습관화된 불안을 반복적으로 나타낸다. 문짝은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그곳은 자물쇠와 열쇠를 가진 주체의 의지에 의해 여닫아져야 한다. 조용하고 은밀하고 신중해서 타자를 비롯하여 자아에게도 신뢰를 주어야 하고 정확한 주문에 답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문은 이행과정을 상징한다. 그곳을 통과해야만 한다. 문짝을 여닫는 주체는 당연히 자신이어야 한다. 문짝은 혼란에 빠져있다. 

숲속의 난쟁이라는 민담에서 의붓딸이 난쟁이에게 받은 3가지 선물 중에는 입에서 금조각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녀가 말을 하면 입에서 금조각이 튀어나오는 선물은 그녀의 말은 신뢰가 가고, 그녀가 말을 하면 즐겁고 위로가 되며 하는 말은 모두 긍정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와 반대로 계모의 친딸이 받은 선물은 입에서 말을 하면 두꺼비가 나온다. 그녀의 거친 말은 누구도 그녀와 교류를 하고 싶어지지 않게 한다. 그녀의 말은 언제나 투덜거리고 남을 험담하고 비판하며 비관적인 말들뿐이다. 문은 우리 몸에서 입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문짝은 벼룩의 비명 소리에 자신의 입을 통제하지 못한다. 계속되는 삐걱거림에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빗자루는 묻는다. 공포에 질린 사람은 사고하기를 멈춘다. 즉 인간의 정신으로 사고하기를 이미 포기했고 사물로써의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 한다.


 “왜 그렇게 삐걱거리니? 문짝아?”

이후로 무한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이 나온다.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이가 달걀 껍데기에 맥주를 끓이던 이가 데인 것이지만 진실은 사라지고 사실만 나열된다. 표면에 나타난 사실에 방구석에 놓여 있던 빗자루는 병적으로 빗질을 한다. 

사물로서, 도구로서 빗자루는 타인에 대한 왜곡된 지각 즉 병렬적 왜곡으로 강박적인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강박증은 개인의 의지에 저항하면서 지속적으로 의식 속으로 침입하는 생각, 심상 또는 충동을 말한다. 강박행동이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불안을 없애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을 말한다. 그들은 사물을 깨끗이 하고 정돈하거나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행동은 불안해서 나오는 행동이다. 빗자루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개인이 생각하기에도 의미없고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강력하게 의식 밖으로 나오기에 무시도, 억제도 되지 않는다.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 그 역시 같은 장소에 있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다른 곳으로 이동도 할 수 없다. 

상징은 다의성을 가지고 있다. 빗자루는 ‘숲속의 난쟁이’에서도 나온다. 딸기를 찾으러 온 의붓딸에게 난쟁이는 빗자루를 건네주었다. 빗자루로 뒷문 밖을 쓸었더니 탐스러운 딸기가 있었다. 빗자루는 쓸데없는 것을 쓸어버리는 도구 역할을 담당한다. 도구는 조력자일 뿐이지 나를 지배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생산적이지 않은 사고, 쓸데없는 번뇌, 억압과 통제를 걷어내는 도구로의 역할을 충실히 실행하게 하는 주체의 행동을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잠재되어 있는 효율성은 자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용납되지 않는 충동과 죄악감은 자아의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청소는 성실한 작업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성실함이 이와 벼룩에서는 강박으로 사용된다. 완벽해야만 하는 자기만족은 일상을 제의로 만들어 자기만의 제의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한다. 

지나가던 마차는 빗질하는 빗자루에게 묻는다. 묻는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고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의미인데 의례적인 질문과 뻔한 대답은 단절이다. 진의를 알고 싶지만 진의는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대답하는 자들도 진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넘겨짚을 뿐인데 감정적 추론이 합쳐지면 갈등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의도를 추론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 상황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전까지는 주변적인 상황에 불과했다면 마차의 등장으로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다. 바퀴는 운명을 상징하며 마차는 움직일 수 있는 이동수단이며 짐을 싣고 나르는 동력이면서 더 넓게는 나를 목적지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말과 마부가 없는 마차는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 목적지를 정할 수 없다. 삶의 원동력인 마차가 스스로 미친 듯이 달린다면 종착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문짝이나 빗자루 자체는 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길을 달리는 수단인 마차는 무엇인가의 방해로 길만 내달린다. 욕구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 충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내적 긴장 상태를 말한다. 사랑, 성취, 관심, 친근, 보호, 음식 또는 성적 흥분 등이 발달 단계에서 충족되지 못하면 욕구는 미친 듯이 그것을 원하다.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마법적 시기는 구강기에 끝난다. 욕구가 결핍된 자들은 외부로부터 채우려고 하지만 외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모 마리아의 아이’에서 성모의 집에서 쫓겨난 아이가 황야를 헤맬 때 먹을 것이라고는 식물 뿌리와 야생 딸기밖에 없었다. 황야를 헤매고 있는 다른 성모 마리아 아이처럼 결핍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우리들 곁에 온다. 서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원하면서 진실된 말을 할 줄 모르고 욕구는 다른 것으로 포장된다. 그들은 삐걱거리는 문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문짝의 말을 들은 마차는 미친 듯이 내달렸다.      

미친 듯이 내달리는 마차를 본 거름더미는 밝은 불꽃을 내며 타오른다. 거름더미는 쓸모를 다해 버려진 찌꺼기다. 버려진 에너지는 타자의 행동으로 불이 붙는다. 감정의 찌꺼기들은 정리되어야 하지만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은 언제나 다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불안의 불씨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 마차라는 동력이 움직이면 이것은 미친 듯이 타오른다. 

거짓말과 싸움질, 파괴와 절도, 물질 남용과 빈번한 법률 위반, 계획적이지 못한 일상은 거름더미이다. 그것은 일상으로 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좌절에 대한 내성이 약하여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자책이다. 그것들은 분노이고 분노가 쌓이면 殺이 된다. 타인을 해치거나 자신을 해치게 된다. 

거름더미는 또 땅속에 들어가 땅을 기름지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우리들의 경직된 사고와 행동의 밑거름이 되어 창조적인 사고를 하게 하는 비료가 된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질서정연하고 획일화된 사고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는 땅에 들어가 반복적이고 훈련된 일상에서 자신의 어두운 면을 숙성시켰을 때 나오게 된다. 창의성은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속에 다른 결과물이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샘에 휩쓸려 갔다.

그래서 거름더미 곁에 작은 나무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무는 자아를 상징하는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나무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떨고 있다. 아직 어려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작은 나무는 자기 방어를 할 줄 모르고 감정 통제가 약하다. 그리고 작은 나무는 무엇보다 수동적이고 유약하다. 나무는 떨면서 자기 잎사귀를 떨구어냈다. 식물에게 잎사귀는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 영양분으로 바꾸는 역할을 담당한다. 나무 잎사귀를 많이 그리는 사람은 자신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불안한 사람들은 힘이 들어 생산적인 일을 많이 해 낼 수가 없다. 작은 나무가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있을 때 처녀가 나온다. 처음으로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처녀는 우리와 갚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다. 그녀가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인간으로 나온 것으로 자아와 타인을 분명하게 구분짓는다. 그녀는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자이다. 그녀는 내면에서 우글거리는 상념들로 떨고 있는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듣고 가지고 있던 물동이를 깼다.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인 문제가 내재된 문제들을 폭발되어 괴로운 운명을 좋은 것으로 바꿀 전환점을 가지고 온 용기를 깨버린 것이다. 

이와 벼룩과 빗자루와 문짝, 빗자루와 마차, 거름더미와 작은 나무는 아직은 사람으로 분화되지 못한 존재이다. 처녀가 물동이를 깬 이유를 듣고 샘은 미친 듯이 물을 쏟아냈다. ‘그 바람에 처녀, 나무, 거름더미, 마차, 문짝, 벼룩, 이는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모두 그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외부에서 닥치게 되는 위험과 위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는 깨졌기에 내면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샘에 휩쓸리고 만다. 이것은 무의식에 휩싸이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엇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샘은 이런 불안한 상태를 정리할 수 있는 중심이 되는 사람이다. 일을 하지 않는 무기력의 상태에 있는 불안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타인이 왔을 때, 우리의 태도는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한다. 처녀처럼 타인은 우리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우리를 수용하지는 않는다. 

끓는 맥주에 몸이 덴 이나, 비명을 지르는 벼룩, 미친 듯이 삐걱거리는 문짝과 쓸고 있는 빗자루, ‘미친 듯이’ 행동한 마차와 거름더미와 샘은 위협적인 상황이나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느낌을 회피하기 위해 무의식적 방법의 하나이다.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거나 바쁜 일을 참여하는 방어적 반응이다. 목적지를 모르면서 어디든지 가는 행동과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을 물론이고 타인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지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일이 성사되지 않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불안이란 타인에게 민감하고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너와 나의 차이를 온전히 구분하지 못한 경계없는 경계선에 있는 자들은 인생을 낭비하고 커다란 심리적 손상을 입는다. 그들은 언제나 달걀 껍데기에 맥주를 끓이고 그 속에 빠진 이를 보고 비명을 지고 자신만의 안위를 걱정할 뿐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이지만 내재된 문제들이 폭발되었을 뿐이다. 이는 불안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와 함께 하면 괴롭고 손해를 입게 하고 모든 것에 의심을 갖게 한다. 곁에 있는 벼룩은 얼간이처럼 항상 이에게 시달려 그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하지만 도망치질 못한다. 그에게 이는 대상부착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부착은 한 가지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자신과 관계를 가진 모든 대상, 인간, 사물 또는 신체의 일부도 가능하다. 목적과 인간이 관계하는 신념, 목적, 이념 등 추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부착은 정신적 에너지가 어느 한 방향으로 대상에게 집중하거나 투여하는데 이와 벼룩에서는 하나로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미친 듯이 넘쳐나는 샘 역시 타인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에너지라면 넘치는 에너지로 인해 샘은 고갈되고 만다. 그리하여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무기력상태가 된다. 그것이 절망이다. 샘은 파괴적이지 않지만 저급한 존재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충동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와 벼룩은 경고의 이야기이다. 해결되지 못한 리비도는 이처럼 작게 시작되지만 점점 커지게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말이다. 대상의 고통으로 자신을 해하지 말 것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내부와 외부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는 아직 인간으로 분화되기 전의 나이기도 하다. 자신이 데어버릴 때, 그 옆에 살고 있던 벼룩과 문짝과 빗자루와 마차와 거름더미들이 같이 요동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호처를 벗어나서 다른 존재로 살지 못하는 의존하고자하는 마음을 끊어내지 못하고 자립하지 못하는 벌레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서술형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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