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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30. 2022

난롯가에서 기다린다.

나를 기다리는 부모를 만났는가(그림형제 동화에서 만난 엄지둥이)

민담의 주인공들은 자질은 부족하고 환경은 열악하고 바보이거나 멍청이거나 버림받거나 쫓기는 이방인이고 남들과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다. 그들은 영웅처럼 사회체제를 바꾸거나 유지하기 위해 대단한 소명을 받은 자가 아니다. 자신의 발달과정을 무사히 넘기고 다음 단계로 무난히 넘어서서 사회를 수용하고 자신의 개성화를 달성하기 위한 범부이다. ‘때가 되면’(천기) ‘장소를 이동하고’(지기) 도구를 사용하고 주변의 사물들을 이용하고 사람을 만나(인기) 모방하여 사회 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터득한다. 

자기의 욕구를 그대로 표현해도 보복당하지 않는다는 안전감과 자기 자신이 절대적 존재에 의해 존중받는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는 자기애 상태를 충분히 맛본 사람은 자신의 공격성을 파괴충동이 아닌 창조적 자기표현 욕구로 전환할 수 있다. 엄지둥이의 환경은 그가 걸어가는 길에 따라 경험하고 수용하여 건강한 사회성원으로 발달하도록 도와준다. 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듣고 말을 조종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처음에는 그것을 거절했으나 아들의 하고 싶다는 욕구를 받아들인다. 말의 귓속으로 넣어주는 어머니의 손이라는 수용적 환경과 말의 귓속에서 꺼내어 거친 땅이 아닌 밀짚 위로 올려주는 아버지의 허용적인 행동에 엄지둥이는 세상 밖으로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혼자서 말을 조종한 아이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과도한 자의식은 곤경에 처하게 되지만 영특하고 민첩하게 자란 엄지둥이는 슬기롭게 다음 단계로 ‘미끄러져’ 넘어서게 된다. 긴 여행 끝에 집에 돌아온 부모는 엄지둥이에게 새 옷을 입혀주었다며 끝맺음을 한다. 엄지둥이의 새 옷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준비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엄지둥이가 만난 사람들

아직 아이가 생기기도 전에 아이를 바라는 농부가 있다. 난롯가의 불을 헤집으며 집에 아이가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준비된 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에 동조하지만 엄마가 되는 걸 주저하는 부인이 있다. 한 밤중 난롯가 불은 밝고 따뜻하다. 이야기 속에서 손과 눈이 불을 향하고 서로 말을 주고받는 상호 소통의 공간이 불 곁이다. 열정과 기대를 담은 아버지는 안락한 장소에서 아이를 고대했다. 

아늑한 난롯가는 아이가 성장하는 환경에 무궁무진한 자원이 된다. ‘언제’라는 시간적 배경과 ‘어디’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정체성이 성립되고 ‘어떻게’라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져 자기라는 최고의 가치를 형성하게 된다. 

농부라는 직업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농부란 직업은 구강기 직업 원형 중에 가장 좋은 캐릭터에 속한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고 한 마을에 성원으로 보수적이지만 인내심이 강한 캐릭터이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로는 최고이다.

옛날에,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라는 과거에 그들이 있었다. 엄지둥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농부와 그의 아내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은 아직 부모를 만나지 않았지만 난롯가 앞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를 가졌다면 아이들은 행운이다. 준비되고 기다리는 부모는 자식의 어떠한 모습도 온전히 받아 들 수 있다. 밤의 난롯가 불은 열정과 따뜻함과 휴식을 나타내며 앞으로 태어나게 되는 아이가 만나게 되는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작은 것은 당연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영웅이 될 조짐을 가진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아는 농부인 아버지를 가졌고, 따뜻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난롯가가 있는 평범한 집의 아이들은 살면서 배운다. 

요구가 거절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는 조력자들을 가진다. ‘사과 주세요.’ ‘이것 해주세요.’ ‘오른쪽,’ ‘왼쪽’으로 명령을 했을 때, 말이 엄지둥이의 명령에 복종했듯이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것 같은 과잉 자의식에 아이들은 우쭐우쭐 의기양양해진다. 아버지와 다른 자신을 내보여도, 실패를 해도 괜찮은 경험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통해 카리스마를 자연스럽게 지닌다. 

엄지둥이의 엄마는 ‘아버지와의 약속 시간’이 되자 말을 마차에 매어주고 엄지둥이를 말 귓속에 넣어주었다.’ 엄마가 직접 아이를 말의 귓속에 넣어준 행동이다. 말의 귓속에 들어가는 행동은 엄지둥이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수용적인 엄마의 손길이 그를 말의 귓속으로 안내를 해야 한다. 보호자는 아이의 부당한 요구에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들어주고 보호자의 눈은 아이의 모든 행동에 주시해야 한다.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하는 것을 허용하고 위험에 노출되어도 부드러운 손길이 곁에 있다는 안도감에 아이는 모험을 떠나고 결과보다 과정을 통해 실수와 성공을 배운다. 

‘실패해도 괜찮아.’ 어린 시절의 많은 실수와 실패는 성인이 되었을 때 만나게 되는 길모퉁이 갈림길에서 낯선 자를 만나게 될지, 괴물을 만나게 될지를 결정한다. 허용되는 환경은 낯선 환경이나 사람, 사물들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것들이 장애물이 아니라 즐거운 모험이 된다. 성장하여 돈과 시간, 공간 속에서 자신에게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가장 큰 사치를 누리게 된다. 작고 부족한 아이였지만 잘 먹이고 잘 키운 엄지둥이는 온전한 인격체로 부모에게 받아들여졌기에 가능하다.

숲으로 일하러 떠나는 아버지는 엄지둥이가 배워야 하는 사회적 어른의 모습이다.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일하러 떠나는 한 사회 성원으로써의 모습이고 아이는 그것을 모방하려고 했다. 숲이란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자연의 삶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장작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어른들은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하려고 하는 자립심을 기르기 위한 수련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밥을 먹겠다고 떼를 쓰고, 옷을 입겠다고 하고, 혼자서 신발을 신으려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흘리는 밥알을 말없이 치워주고, 겨울에 여름옷을 입는 아이가 감기 걸리지 않게 조절해주어야 하고 거꾸로 신은 신발 때문에 넘어졌을 때 약을 발라주어야 한다. 

버릇이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것은 모든 여행이 끝난 뒤, 그 때 훈육하여도 괜찮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모두 채운 뒤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행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문명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 역시 자연이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문명을 발달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 농부의 계산은 덧셈과 뺄셈이 있다. 그때 1+1이 2가 되지 않았다면 그 사이에 분명 변수가 생겼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 문제가 바로 엄지둥이의 엄마가 농부인 아버지의 의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아이는 많은 구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과정에서 만나는 길모퉁이는 선택지이다. 그곳에는 낯선 자들이 있다. 길모퉁이는 그동안 단순했던 삶에서 복잡한 환경으로 진입하게 되는 길목이다. 길모퉁이를 지나 아이가 간 숲은 낯선 무리들의 집단이다. 그때 아버지는 왼손으로 말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아들을 말의 귀에서 빼준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보호자는 허용하면서 알려주어야 한다. 의기양양한 아이의 기를 꺾지 않으면서 통제와 조절을 잘 사용하여 아이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엄지둥이의 아버지가 말의 귀에서 꺼낼 때 밀짚 위에 내려주었다는 것은 아이가 명령어를 구사했을 때 다치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뜻이다. 아이의 발밑에는 언제나 밀짚이 깔려있어 힘껏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숲으로 인간들의 군상이 있는 자연 속에서 나와서 다른 환경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에 이미 낯선 사람들이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낯선 자들은 아이를 이용하여 돈을 벌기 위해 아버지에게 아들을 팔라고 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거절했지만 자기보다 훨씬 큰 말을 움직였다는 아이의 자부심은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하고자 했다. 아이는 아버지 저고리 주름을 타고 올라가 아버지의 어깨 위에 섰다.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얼마나 넓었을까. 아버지는 아이의 말을 듣고 많은 돈을 받고 아이를 팔았다. 엄지둥이는 낯선 자들의 모자 테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에 쓴 모자 위에 올려 진 엄지둥이는 세상을 관찰한다. 보통 성찰하고 넓은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나무 위에 올라간다. 

그런데 엄지둥이는 세상을 관찰하기 위해 낯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모자는 신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생각과 사고와 사상을 의미한다.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 모자 테두리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사고를 배우며 관찰하게 되었다. 엄지둥이는 낯선 자들의 사상이나 사고에 매몰되지 않고 벗어나기로 하는데 벗어나는 방법이 참으로 재밌다. 

엄지둥이는 오줌을 누고 싶다는 말을 하고 낯선 자들은 ‘그곳에서 볼일을 보라’고 말했다. ‘다른 새들도 그렇게 한다,’면서. 새들은 지나가는 자들이다. 사고나 사상을 배운 자들의 행동이 파렴치하여도 낯선 자들은 오물을 감내한다. 도시에 나가서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불편하거나 부당한 것들을 감내한다. 내게 똥물을 뿌려도 내가 이용하려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을 보면서 이득을 보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서로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이용하는 자들이 주변에서 만나게 될 때 낯선 자들의 모자를 생각하게 된다. 오염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의 모자 위에서 오물을 뿌리는 자들을 내치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있다. 그들은 사상이나 철학을 가지고 사람을 소유하려고 한다. 

뇌를 의탁한다는 말이 있다. 다른 자들의 사상을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알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시각을 갖기에는 자신이 엄지만큼 작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사고나 사상을 빌려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자 한다. 남의 사상이나 철학은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된다. 엄지둥이가 만난 낯선 사람들은 사람을 팔라고 하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사고 중심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낯선 자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모자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 땅 위로 걸어가기가 현실을 대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실은 자신의 두발로 경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야 하기에 어렵다. 자부심이 강한 엄지둥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또한 낯선 자들이 아이를 사고파는 파렴치한 자들이기에 아이가 처음 배운 것은 그들을 속이는 일이었다.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사람은 사람으로 대해야 하지만 사기꾼에게는 사기꾼의 방법이 아니면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해준 그림형제의 방법이 무섭다.

또한 엄지둥이는 도둑을 만나게 된다. 아이는 초자아를 배워야 한다. 젊은 사람이 노련한 권위자와 대결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이것은 어떤 힘을 동일시를 통해 자기 것으로 흡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초자아는 목사관에 있다. 초자아가 있는 장소에 도둑과 목사와 하녀가 산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그것을 가지고 올 수 없기에 훔쳐야 한다. 양심과 비양심이 같이 공존하는 또 하나의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엄지둥이가 들어간 여러 개의 구멍과 장소

엄지둥이는 다섯 개의 구멍 속에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말의 귓속에 들어갔고 낯선 사람의 모자에서 내려와 쥐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빈 달팽이 집과 암소 뱃속, 그리고 마지막에는 늑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들어간 장소가 비단 이것만은 아니다. 모자 테두리와 목사관, 외양간과 헛간, 하수구와 식료품 저장실 등 다양한 곳을 다녔다.

맨 처음 들어간 말의 귓속에서 엄지둥이는 말에게 명령하여 방향을 제시했다. 청각은 무시할 것과 주의할 것을 지시할 수 있다. 그것은 안전한 선에서 조절하고 통제할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권력을 가지고 지배할 능력이다. 힘을 가지고 자기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게 되는 걸 의미한다. 명령이란 것은 주로 타인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내부의 힘에도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화를 내거나 인내를 하게 되는 것도 힘을 필요로 한다. 내가 나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면 날뛰는 본능은 통제되거나 조절되지 않는다. 엄지둥이가 제일 먼저 들어간 말의 귓속은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 속에서 조절되지 않는 말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아버지가 말한 고삐가 그것이다. ‘넌 너무 작아서 말고삐를 쥘 수도 없을 텐데’ ‘아버지는 왼손으로 말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아들을 재빨리 말의 귀에서 꺼냈다.’ 

아버지가 하는 행동을 모방하면서 아들은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모든 행동은 자녀들의 교과서이다. 하지만 말의 귓속에 넣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아이가 아버지가 말한 때가 오면 엄마는 장소로 이동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롯가 앞에서 아이를 기다린 부부는 합심하여 잘 먹이고 잘 키우면서 아이가 발달할 시기가 오면 시간과 공간을 같이 계획하여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넘긴다. 부부의 양육방법은 혼란을 가져오지만 엄지둥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훈육하고 있다. 숲이라는 외부세계와의 소통은 아버지가 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 마차에 말을 매어준 엄마는 아이에게 자유의지를 연결해주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아이를 받아들이는 엄마일 때 아이는 아버지가 있는 외부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엄지둥이는 남자아이기에 엄마가 협조자 역할을 담당한다.     

낯선 사람의 모자에서 벗어나 들어간 곳이 바로 쥐구멍 속이었다. 쥐구멍과 빈달팽이 껍질은 지나간 흔적만 있을 뿐 쥐와 달팽이는 없는 장소이다. 쥐구멍 속으로 들어간 엄지둥이는 쥐처럼 낯선 사람들을 놀렸다. 도시에 가서 아이를 통해 이익을 볼 생각을 한 낯선 사람은 아이를 샀다. 사람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술수가 담긴 매수를 아이는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빠져나와 놀렸다. 그곳이 바로 쥐구멍이다. 쥐는 약하지만 약삭빠른 동물을 상징한다. 동물은 공격성을 의미하는데 공격성은 수동 공격과 능동 공격이 있다. 수동 공격은 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할 때 막는 것으로 자기 방어적인 성격이 짙다. 능동 공격은 먹기 위해 공격하는 것이다. 지배하고자 할 때 나타난다. 두 개의 공격성은 필요하다. 

낯선 자들의 사고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쥐처럼 약삭빠르게 그곳을 벗어나야 하고 재빨리 쥐구멍 속으로 도망쳐야 한다. 낯선 자들은 우리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낯선 자들이 엄지둥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쥐구멍을 막대기로 쑤시듯이 우리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한다. 죄책감을 자극하고 수치를 들춰내려고 하지만 엄지둥이는 작기에 더 깊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낯선 자들은 엄지둥이를 소유하지 못했다. 쥐구멍 속에 있는 엄지둥이를 꺼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지만 아이는 우리 손을 떠났다.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떠난 아이는 스스로 나오지 않으면 꺼낼 수가 없다. 쥐구멍은 쥐가 자신이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끼기 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밤이 되어서 나오는 엄지둥이는 빈 달팽이껍질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 역시 동물성을 가진 장소이다. 그곳은 달팽이가 버리고 간 곳이라 과거에 속한다. 엄지둥이는 과거로 퇴행하여 죽은 듯이 있다. 마차를 이끌고 낯선 자들의 모자 테두리를 걷고 땅 속을 헤매던 아이는 쉴 곳이 필요한데 그곳은 바로 과거에 달팽이가 살았던 곳이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이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한 장소가 빈 달팽이껍질이다. 외부세계와 소통에서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것이 공격성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공격만 하면서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들다. 공격성은 필요할 때 나와야 한다. 

밤에 움직이게 되면 목과 다리가 부러질 위험이 있다는 엄지둥이의 현명한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목은 몸체와 머리를 연결해준다. 머리에는 뇌와 얼굴이 있다. 뇌는 모든 것의 총사령탑이다. 뇌는 모든 가능한 감각신호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모든 신호들을 몸에 전달한다. 눈과 귀와 코와 입을 통해 들어온 모든 것을 통합하여 선별하고 온 몸의 기관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뇌이다. 그런 머리를 지탱하는 곳이 바로 목이다. 목은 그래서 통제와 조절을 상징하게 된다. 목이 부러진다면 몸으로 전달되어 행동을 해야 하는 사령탑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리는 뇌의 명령을 자유의지로 움직이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다리가 잘못되었다면 내가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움직이는데 제한을 받게 되고 어떤 것을 하게 되는데 한계를 가진다. 다리는 물론 움직이게 하는 모든 도구들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장소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며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한다. 그런 것들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며 빈 달팽이껍질에 쉬는 엄지둥이는 영리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이야기 속에 엄지둥이는 다음날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쥐구멍 속으로 숨어 있고, 빈 달팽이껍질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호기롭게 길을 나섰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데 실패한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좌절하고 만다. 쥐구멍에 들어갈 때 엄지둥이의 조롱을 보면서 아이들이 부모를 가지고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아이들은 우리를 놀리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그 놀이를 하면서 소위 ‘간’을 볼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아이가 그 행위가 질릴 때까지 놀아주어야 하는 인내심과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건강함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내심은 고사하고 건강함도 없고 긍정적인 마음은 더 없다. 우리의 에너지는 타자를 향해 있을 뿐 나의 아이에게 줄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건네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자신이 부모에게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로인해 아이는 외롭게 된다. 언제까지 놀아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이는 기는 습관을 그만 둘 필요가 없다.```` 걷는 것이 돌아다니기에 더 쉽다는 걸 알게 되면 저절로 그 습관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모와 노는 것보다 또래 친구와 노는 것이 더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는 우리의 치마폭으로 오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프거나 졸리거나 다치면 우리 곁으로 온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천천히 아이는 자립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엄지둥이가 배워야 할 것이 더 있었다. 그것은 도둑들을 통한 초자아의 모습이다. 도둑들은 땅과 같이 있을 때 다가왔다. 땅바닥은 현실과 가까이 있고 도둑은 목사와 같은 쌍으로 엄지둥이에게 나타났다. 낯선 자들에게는 거래를 배우게 되었다면 도둑들에게는 초자아의 모습이 있다. 도둑은 누구보다도 정의를 외치고 공평을 말한다. 왜냐하면 도둑은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기에 목사가 가지고 있는 정의와 공평을 훔쳐서라도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목사가 가진 금과 은은 그런 상징을 가지고 있다. 초자아는 욕망의 탐색 과정을 거쳐야 알 수 있다. 욕망을 조절하려면 정의와 공정이라는 사회적 관습이 적용되는 범위를 알아야 한다. 사회와 국가, 개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관습을 탐색하여야 다른 환경 속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쇠창살 속에 있어 그들끼리 공유된 정의와 공평은 도둑들에게 아주 탐나는 보물이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또한 엄지둥이처럼 작아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 또한 조금만 가져오면 된다. 남의 초자아는 조금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과도한 초자아는 사람들에게 쇠창살처럼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들게 한다. 엄지둥이가 목사가 될 것도 아닌데 지나친 초자아를 형성하여 평생을 속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에 소유에 대한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 지나친 정의로움은 아이에게 스스로 사회 규율을 따르게 하는 것과 현저히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우리 사회의 이중성이 그것과 같다. 정의와 공평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정의와 공평은 이중적 잣대를 가는 사회. 도둑과 목사를 한 카테고리에 넣은 그림형제의 이야기 방식은 정말 경이롭다. 

관찰하는 것은 흡수하는 것이다. 도둑의 삶과 목사의 삶을 관찰하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는 자들이 가장 정의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이 도둑과 목사이다.      

엄지둥이는 헛간의 건초더미에서 쉬게 된다. 하지만 길을 떠난 엄지둥이가 쉴 곳이 과연 있을까? 지친 엄지둥이는 날이 밝는 대로 부모에게 돌아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길모퉁이는 개인적 변화에 중심을 두게 되지만 모서리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엇인가의 변화로 인해 진화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초자아를 획득했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면의 변화는 모서리에 있다. 건초더미에 있었는데 어느새 암소의 입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아득함은 난처함을 떠나서 슬프게 한다. 암소의 입속을 마전공장으로 표현했다. 어디에 있고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는 것은 대상분석을 했을 때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을 빠져 나가려면 소리를 질러야 한다. 능동적인 자기 목소리를 내어야만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 구원하려 올 수 있다. 암소는 초식동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물이기 때문에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어주지 않는다. 엄마의 애정에 아이는 감당하지 못해 반항을 하게 된다. 

계속해서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다. 먹는다는 행위는 죽이는 행위에 속하기도 하며 그것은 애정을 먹는 것으로 치환하면 부모에게나 친구나 연인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것이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이 회피하게 만들 수 있다. 애정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계속 준다. 그러나 사람마다 가지게 되는 욕구는 다 다른데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주게 되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게 되는 형국이 된다. 그리고 주었으니 그에게 의존해도 된다는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상대방은 그를 향해 소리치게 된다. “그만 하라고. 좀”

엄지둥이가 들어간 암소의 위는 불빛은 고사하고 창문하나 나 있지 않다고 했다. 끊임없는 애정은 희생과 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사람을 절망 속에 빠지게 한다. 아이들은 ‘싫어’라는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 그래야 암소의 위 속에 실수로 들어갔어도 소리쳐 나올 수 있게 된다. 물론 귀신들린 암소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끊임없이 베푸는 귀신들린 사랑이 족쇄가 될 때, 그것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상대방의 죽음 말고는 없다. 살인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단절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인내심을 갖게 되고 의존성이 없어지게 된다. 암소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이제는 더 위험한 구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전에 엄지둥이는 거름더미에 던져졌다. 간신히 빠져나와 머리를 내미는 순간, 늑대가 소의 위를 삼켰다. 늑대는 더 큰 공격성을 상징하게 된다. 수동적인 공격을 배우던 엄지둥이는 더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게 된다. 아이의 막무가내 떼쓰기를 보게 된다. 아이도 적당한 타협점을 찾으려고 하지만 아직은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떼쓰기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그들은 늑대의 뱃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타협점을 찾으려고 한다. 엄지둥이는 배고픈 늑대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부모에게 있는 식료품 저장실로 유인한다. 배고픈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장의 허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하수구를 지나야 한다. 

하수구는 모든 것의 찌꺼기가 지나가는 곳이다. 마음에 담고 있는 죄책감과 자존감을 모두 통과해야만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곳으로 다시 가기 위해서는 늑대가 먹고 싶어하는 모든 먹거리를 욕구를 채워야 한다. 포만법이라는 치료가 있다. 발달과정에 미해결된 욕구를 모두 채워야만 다른 욕구로 넘어서는 것인데 보통은 어떤 욕구에 걸렸는지 알기가 어렵다. 배가 너무 부른 늑대는 무감각해지고 다시 전진하지 못할 때 강력한 위험 신호를 보내야만 부모가 알아챌 수 있다. 엄지둥이는 아버지가 낯선 자들에게 넘겨주었고, 목사집의 하녀에 의해 거름더미 속으로 버려졌고 늑대의 뱃속에서 하수구를 통과해야만 했다.      

여기서 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엄마는 낫을 들고 저장실로 온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어른의 모습으로 다가와야 한다. 아이가 늑대처럼 공격적일 때 그 모습을 볼 때 아버지가 아닌 어른이여야 아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객관적인 눈으로 아이를 보면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지 안다.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단호하게 도끼로 늑대를 죽이고 뱃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아이가 다치지 않게 칼과 가위를 가지고 섬세하게 자르는 엄마의 손길로 꺼내야 한다. 비로소 아이는 숨을 쉬게 된다.      

늑대의 뱃속에 들어갔을 때 엄지둥이는 비로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계획이다. 긴 여정 끝에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설 준비가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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