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하다

by 따뜻한 말 한마디

고3. 국립대밖에 선택지가 없던 그 시절, 나는 점점 공부에서 멀어졌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반응에 맥이 빠졌고, 더 이상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수능을 본다 한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지역에 하나뿐인 국립대뿐이었다.

목표가 없는 시험이었다.

그래도 운은 따랐다.

1, 2학년 내신이 망가진 3학년을 덮고도 남았다.
그렇게 2005년이 지나갔다.

수시 모집에 겨우 탈락을 면한 수능 성적이었지만,
나는 결국 그 하나뿐인 국립대에 합격했다.

가고 싶었던 학교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성적에 그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마음을 다잡고 등록을 했다.

첫 학기 등록금은 어머니 지인들이
조금씩 보태주신 돈으로 마련됐다.
그렇게, 나의 캠퍼스 생활이 시작됐다.

대학에 가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연애도 하고, 엠티도 가고,
낭만도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게 닥쳐온 건
등록금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뿐이었다.

전공은 기계공학. 나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과였다.

성적에 맞는 학과가 그곳뿐이었고,
취업이 잘된다는 말에 마지못해 선택했다.
당연히 성적은 장학금 받을 수준이 아니었다.


학비에 대한 걱정은
나와 어머니의 숨통을 죄었다.
앞으로 4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그 생각뿐이었다.


1년이 그렇게 흘렀고, 나는 군대에 갔다.
어머니는 말했다.
“갔다 오면 몇 학기 등록금은 모여 있을 거야.”
2년 뒤엔 뭔가 바뀌겠지.
그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입대했다.


군 생활은 생각보다 마음이 편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 생활하는 건 버거웠지만,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전역만 바라보며 보내는 건 의외로 나에게 맞았다.
그렇게 2009년 5월, 전역했다.


복학 후 첫 등록금도
다시 어머니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련했다.
그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문제는 2학년 2학기부터였다.
등록금은 여전히 막막했고,
아르바이트로는 학비 전부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성적에 대한 압박은 날로 심해졌다.


그러던 중 ‘차상위 장학금’이라는 제도를 알게 됐다.
그걸 받기 위해 나는 학교 행정실과 교수실을 오가며
수없이 서류를 챙기고, 사인을 받으러 뛰어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피해 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 눈에 비친 행정실 직원의 표정은 싸늘했다.

귀찮다는 기색과, 어딘가 깔린 동정심.


스물넷의 나는 또다시 내 처지를 원망했다.

다른 친구들이 여행을 가고, 학원을 다니며 방학을 즐길 때,
나는 며칠째 학교에서 장학금 서류 하나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에 처음 올 때보다,
그 여름은 더 서럽고 더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집안을 풍비박산 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
2010년 여름,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그해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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