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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열 Jun 28. 2024

깜빡이를 켭시다.

 물리적인 거리가 만남의 간격도 결정하는 것일까? 1시간쯤 걸리는 곳에 사는 터라 가끔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자주가 아니라 가끔이라는 간격만큼 반가움은 짙고 시간은 즐겁고 유쾌하다. 이런저런 한담, 농담, 자질구레, 시시콜콜한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한 분이 황당한 일을 당했다며 조심하란다.     

 

 집으로 교통 범칙금 통지서가 왔더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며 내용을 살펴봤더니 어디 어디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꾸면서 통상 깜빡이라고 지칭하는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았다는 거더란다. 발송처로 문의 전화를 했더란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랬더니 증거가 있단다. 뒤차의 블랙박스 영상. 더러 있는 일이란다. 소위 말하는 카파라치. 이런! 하며 뒷 목을 잡았다나. 그렇게 웃고 넘어갔다.     


 며칠이 지났다. 반려견과 함께하는 산책길이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 멈춰 서서 차량이 오는지 살핀다. 깜빡이를 켜지 않은 차가 다가오고 있다. 평소 좌회전하는 차가 많은 곳이라 저 차는 직진하겠거니 하고 기다린다. 그런데 어라! 좌회전하여 가버린다. 옅은 배신감이 쓰윽 스쳐 지나간다.    

 

 이번에는 중앙선이 없는 좁은 도로에서 운전하는 중이다. 빨간 점멸등이 있는 교차로에 멈춘다. 직진해야 하기에 가로질러야 하는 4차선 도로에서 차량이 오는지 좌우로 살핀다. 좌측에서 깜빡이를 켜지 않은 차가 오고 있다. 또 직진하겠거니 하고 기다린다. 그런데 또 어라! 내가 기다리고 있는 길로 우회전하여 유유히 사라진다. 살짝 허탈하다. 깜빡였으면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더니 깜빡이를 켜지 않는 차들이 생각보다 많다. 방향을 바꾸면서 켜지 않는 차도 많고, 끼어들면서도 켜지 않는 막무가내도 있고, 고속도로에서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차선을 넘나드는 차도 있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가려는 길을 상대방이 알 거라는 착각? 아니면 내 불편은 없으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배 째라 정신의 발현? 법규를 무시하는 준법정신의 실종? 뭐가 됐건 이건 아니다 싶다. 그런데 깜빡이를 켜지 않는 게 운전할 때만 그런 걸까? 놉! 아니다. 살다 보면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경우가 왕왕 있다.      


 화목한 자리다. 정겹고 화기애애한 말들이 날아다니는 사이로 농담도 함께 날아다닌다. 그런데 갑자기 왈칵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누가 봐도 농담이고, 재치이고, 위트이고, 유머인데… 분위기가 ‘싸’ 해진다.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온 화냄이다. 불편하다.     


 이번엔 편한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는 시간이다. 30년 전의 일은 기억하는 데 30초 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여서일까? 개수를 세는 운동의 경우 종종 계산이 맞지 않을 때가 있다. 대부분 되짚어 보고는 가벼운 조크와 함께 제 개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웃자고 하는 그 일에 정색하는 사람이 있다. 깜빡이 없이. 불편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있으면 운동이 운동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또    

 

 살다 보면 예고 없이 도무지 들어줄 수 없는 부탁 또는 요구받는 경우가 있다. 미안함을 무기로 어렵게 거절한다. 부탁은 상대가 했는데 미안한 건 거절하는 쪽이다. 깜빡이 없이 훅 들어와 놀라고 불편한 건 이쪽인데 말이다.     


  차량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깜빡이가 없으면 예측 불가능하고, 그로 인해 위험하고, 불편하다. 그런데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자. 다른 차들만, 다른 사람들만 그랬던가? 노노! 아닐 것이다. 나도 그런 적이 당연히 있었을 테고, 그때마다 깜박하고 잊어버려서, 깜박 착각해서라는 변명으로 넘어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니 반성하자.    

 

 교통법규도 사람과의 관계도 깜빡이를 켜지 않으면 꽤 큰 불편을 초래한다. 내 무신경함의 편함보다 훨씬 큰. 그러니 이제 제발     


 ‘깜빡이를 켭시다.’

 운전하는 길에서도, 사람들과의 동행에서도.


샤갈-녹색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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