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하진 않지만 수영을 좋아한다.
수경을 내려쓰고 보는 물 속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푸른색을 좋아하는 까닭에 물 속 파란빛은 따듯한 일본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고, 꼬르륵 소리가 난 후 멍멍하게 들리는 수영장의 소리가 이상하게 듣기 좋았다. 퍼런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수영장 밑바닥 공간에 정신없이 빠져 있다 보면 숨쉬어야 한다는 것도 까먹는 것 같다. 그렇게 폐에 공기가 다 사라져 입에서 흡 하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물 위로 올라온다. 그러면 수영장 북측에 나 있는 통 유리창을 통해 초록빛이 쏟아진다. 또 그 초록빛이 좋아서 내가 사는 물 밖의 공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주차장을 마주하고 있는 북측 창인데 사이에 큰 나무들을 심어서 다행이었다. 나무는 공기를 맑게 해주면서도 보기에도 좋다. 내가 나무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 큰 북측창은 수영장에 꾸준히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이른 새벽에 수영장에 가면 그 창은 까만 벽이다. 잠이 살짝 덜 깬 시간이라 까만 벽으로 인식해 수영을 하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수업이 끝날 때쯤 되면 해가 뜨고, 큰 유리창은 다시 초록빛을 실내로 밀어 넣어 준다. 그 풍경을 보며 오늘 하루의 시작도 부지런했다는 뿌듯함과, 하루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같이 자유수영을 가던 친구도 수영장 안에선 그 창 이야기를 했다. 수영장 안에서 바라보는 창은 소설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포크스’라는 숲에 온 듯한 기분을 준다고 했다. 그럼 너는 그 여자주인공이 되는 거냐는 농담을 하고 넘어갔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가 했던 말을 계속 곱씹었다. 부천의 한 시립체육관에서 미국의 포크스를 느끼게 하다니. 건축은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장소를 재현시키는 역할을 했다. 새삼 내가 그런 멋있는 일을 배우고 있다는 영광스러움과, 그런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열정이 작게 퍼졌다.
수영장에선 예쁜 공간만 경험하지 않았다. 탈의실은 늘 습했고, 물과의 전쟁을 육지로 끌어온 듯한 전쟁터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머리를 말리려면 헤어 드라이기를 쓰고 있는 사람 뒤에서 물을 맞아가며 기다려야 했고, 양말을 신은 후에는 늘 누군가의 물방울을 밟곤 했다. 특히 마른 가방이나 외투를 잠시 벗어 둘 수 있는 평상에는 몸에 있는 물기를 머금고 그대로 앉아서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이 항상 있었다. 평상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이 있었지만 그들이 얘기하고 웃을 수 있는 공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축축하고 소란스러운 그 공간도 어떤 곳보다 즐겁고 재밌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탈의실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하고싶던 (사회적으로)지속가능한 건축이 이렇게 작고 축축한 평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에 머리가 번쩍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공간과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건축은 몇십년동안 건축을 한 '대가'만이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 작은 평상도 그러한 건축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았다.
사소한 곳에서도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지속가능한 건축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적 행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노력하고, 사소한 것도 허투로 보지 않아서 수영장의 ‘평상’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 이는 대가가 아니여도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애정을 가진다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건축에 더 욕심을 내게 한다.
'평상'같은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가 되어야 될 것 같단 약간의 의무감과,
'수영장(정확히는 수영장 물 속)'같은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가 되고싶다는 개인적인 꿈이 동시에 만나는 날이다. 그치만 오늘은 조금 고된 날이여서 수영장의 푸른 빛이 그리워지는 탓에 의무감은 내려두고 후자의 꿈을 꾸며 잘 것이다.
'수영장' 같이 파-란 시원함을 주는 공간이 나에게 더 생겼으면 좋겠다.
Q)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에게, 당신만의 '수영장'은 어떤 공간입니까? 좋아하는 공간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