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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길몽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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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Nov 05. 2024

길몽#2

횡재수

희강은 토요일 늦은 저녁에 책상 앞에 앉아 포털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로또번호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키보드 옆에는 2개의 초록색 유리병이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병은 한 방울의 꿈까지 모조리 비워버린 희강의 텅 빈 가슴 같은 빈병이었고, 또 한 병은 찌꺼기 같은 한 줌의 희망처럼 절반쯤 남은 병이었다. 알코올은 과거의 풀숲에서 날벌레떼처럼 날아오는 미련을 태우는데 안성맞춤이었고, 올지도 모를 신기루 같은 미래에 찬물을 끼얹은 다음에야 비로소 현실이라는 절망에서 도피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마치 배울만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느 유튜버의 유료강의처럼.

모니터에는 7개의 번호를 지닌 작은 동그라미가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회색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그것은 흡사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서 생성된,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무지개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지개는 빛이 원래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로 굴절되기 때문에 빛을 등지고 서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희강은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1125회차 (202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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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7, 24, 37, 41, 43 + 19

1등 당첨금 2,862,437,698 원 (당첨 복권수 7개)



"에라이 씨팔, 4등밖에 안 되네. 어휴 5만 원이 어디냐 그래도."


희강은 맥주잔에 절반쯤 남은 소주를 따르면서 창백한 화면과 검은색 번호들이 성문처럼 새겨진 종이쪼가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글라스에 가득 채운 소주를 벌컥 마시며, 몇 달 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지나가다가 길거리 자판에 사주운세를 본다는 곳에서 단돈 만원을 주고 심심풀이로 봤던 운세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살아났다. 역대급 한파로 살갗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삭풍이 불어대는 추운 겨울이었다.

두꺼운 벽돌처럼 생긴 명리학책을 뒤적이던 6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초로의 여자는 머리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인 것처럼 백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추위로 벌겋게 꽁꽁 얼어버린 손으로 두꺼운 뿔테안경을 만지작 거리면서 볼펜으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적고는 말했다.


"사장님은 사주에 암록이 있어서 횡재수가 있네요. 중년쯤에 어느 순간 큰 변화가 있긴 할 겁니다. 근데 중요한 건 암록은 잘 쓰면 횡재가 되지만 잘못 쓰면 파멸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큰 욕심은 갖지 마시고 허황된 것을 쫓지 마세요."


그녀의 얼굴에 깊이 패인 여러 갈래의 주름들은 오랜 시간 노상에서 지내온 그녀의 핍색한 세월들을 대변하듯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횡재수라.. 언젠가는 큰 재물이 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하고 헛된 믿음이 들어선 계기가 아마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맥이 풀리면서 픽, 하는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가 삐져나왔다.

폐업신고를 하기 전 한창 사업을 진행하던 중에 플랫폼의 운영정책이 바뀌어서 매출이 예상하지 못한 수치로 급감할 때에도 조금만 버티면 나아질 거라는 긍정적 회로가 부적절한 추론을 낳은 이유도 아마 횡재수라는 단어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의 벽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강은 소주를 마시고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오뎅볶음을 집어먹으면서 그 초로의 여자를 헐뜯기 시작했다.


"그 나이에도 노상에서 그런 짓거리나 하고 있는 이유가 다 있는 거야. 사주팔자를 완전 야매로 보는구먼. 의사만 돌팔이가 있는 게 아니라니깐. 호구들 뽑아먹을라고 사기꾼들 천지네. 어휴 이 헬조선. 말세다 말세야."


어둡고 좁은 방에 틀어 앉아 홀로 우울한 세월을 마시고 남을 힐난하는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 들어온 어머니는 한 손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서는 식욕을 돋우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오셨수."


희강이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 한복판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어머니를 반겼다. 그가 걸어 나온 자리마다 원귀처럼 고약한 냄새가 따라붙었다. 어머니는 후각이 둔하신 건지, 냄새를 맡고도 아들이 무안할까 봐 일부러 모른 척하시는 건지 아무런 기색도 없이 자신을 환영해 주는 아들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자, 이거. 시장에서 족발 사 왔어. 여기 족발이 잡내도 안 나고 부드러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줄 서서 먹더라. 다 팔고 몇 개 안 남은 거 겨우 사 왔다."


어머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며 아들의 표정에서 오늘하루도 무탈하게 지냈는지에 대해 판독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야에는 희강의 어깨너머로 좁은 방안의 남루한 풍경이 들어왔다.

선연한 초록색의 빈병들과 기름때가 낀 플라스틱 반찬통이 책상 위에서 무질서하게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비닐봉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고, 이거랑 같이 먹거라. 건강도 생각해야지."


"아, 무슨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할게요. 피곤하실 텐데 좀 쉬세요."


어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 같아서 희강의 입에서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시름에 잠긴 듯이 수심의 눈빛으로 희강의 어깨를 바라보다가 시지프스처럼 매일 반복되는 숙취에 고통스러워할 아들을 위하여 콩나물국을 끓여 놓는다며 주방으로 가서 냄비를 꺼냈다. 도마 위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어머니의 거무스레한 손을 보고 희강이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아무튼 잘 먹을게요."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시고 다시 콩나물을 다듬었다.

광채 나는 어머니의 웃음을 본 게 언제이던가. 희강은 기억을 되살릴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쓸모를 세상에 제시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매몰시켜 버린 중년의 남자는 네버랜드에서 떠나지 않고 캥거루족이 되어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라는 사회적 지탄에 서서히, 마치 악마의 손아귀에 영혼이 증발되듯이 자신감과 용기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음침한 책상에 앉아 어머니가 사 온 족발 한 점을 들고 상추쌈을 싸서 입안에 구겨 넣었다. 벽 쪽에 붙은 작은 거울에 상추 찌꺼기가 낀 앞니가 불결하게 비쳤다. 희강은 꾸역꾸역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속으로 뇌까렸다.


'엄마. 살다 보면 저한테도 좋은 날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모든 게 다 좋아질 거예요.'


주방의 형광등은 늦은 밤 11시까지 꺼지지 않았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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