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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길몽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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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Nov 06. 2024

길몽#3

코털


2024년 06월 28일 금요일

방 안에서 자고 있음. 눈부신 햇살에 눈이 떠짐. 욕실로 가서 소변을 보고 거울을 봄. 코 밑으로 코털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있음. 그 코털이 삐져나온 부분이 현미경으로 확대한 것처럼 거대하게 보임. 너무 길고 굵어서 한 손으로 잡으면 뽑힐 것 같음. 두꺼운 코털을 손에 쥐고 있는 힘껏 뽑아버림.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코털이 모두 빠져서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 부분이 휑뎅그렁하게 남아있음. 꿈속에서 개운함을 느낌. 피를 흘리진 않음.


희강은 간밤에 또 꿈을 꾸었다. 휴대폰으로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이번에도 꿈이 너무 생생해서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 메모장에 기록했다.

코털을 뽑는 꿈이라니. 근데 꿈속에서 느꼈던 기분이 너무 개운하고 산뜻해서 주변의 공기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꿈을 기록하고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낡은 거실 소파는 앉아 있던 자리가 움푹 파여있었다. 작은 규모를 도려낸 것만 같은 소파는 어머니가 방금 전까지 앉아있었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인근 식당으로 10시 30분까지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희강은 물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서 코털을 뽑는 꿈에 대해서 검색을 했다. 희강은 이번에도 제발 길몽이길 바랐다.

거창한 어떤 일이 아니라도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을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별 볼일 없는 자에게 별 볼일은 생각보다 잘 일어나지 않았다. 별 볼일은 애써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 지루하고 권태로운 나날들에서 잠시동안만 벗어나서 삶에 입혀진 따분함이라는 거죽을 뜯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따분함마저도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희강은 여태 깨닫지 못했다. 오직 서광의 횡단보도에서 청신호가 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직접 코털을 뽑는 꿈은 자기 개선에 대한 강한 욕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싶거나 더 나은 모습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꿈에서 자신이 이 행동을 주도적으로 했다면 변화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하거나 의견이 맞지 않은 사람과 갈라설 수도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변 인간관계가 깔끔하게 정리될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변화라.. 내가 변하거나 내 주변이 변한다.. '

희강은 변화에 대해 둔감했다. 감각이 둔한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도외시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왠지 모르겠으나 변화가 주는 새로운 환경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거실에 조명을 바꾸거나, 은은한 향기의 디퓨저를 비치해 두어도 희강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한참뒤에 어머니가 무엇을 바꾸었다고 말을 해야 알아보았다. 아마 전 여친과 헤어진 이유도 변화의 기복 속에서 필연일 수밖에 없는 위태로움이 제 구실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 긴 머리에서 단발로 머리를 잘라도 입술 틴트의 색깔이 빨강에서 파랑으로 바뀌어도 가느다란 눈썹이 송충이처럼 변해도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무관심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외면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인간은 본래 안정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걸 희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안정을 갖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지만 묵정밭에 희망의 씨앗을 파종하고 비옥한 토양으로 만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안정의 이면에는 권태로움이 자리 잡고 있고 권태는 현상을 바꿀 의지마저 앗아가 버린다는 걸. 안정의 상태에서는 자기가 스스로의 에너지를 갉아먹는다는 걸 희강은 모르고 있었다. 희강이 변화에 대해서 한창 골몰하고 있을 때 책상 위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고등학교 친구 학만의 전화였다. 학만은 현재 블로그 마케팅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자기 계발에 열을 올렸던 터라 나름대로 그 바닥에서 기반을 잘 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왜."


"왜긴 왜야. 새꺄. 살아있나 생존확인차 전화한 거지. 별고 없고?"


"어후, 귀하신 분이 누추한 빈농의 자식에게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성은이 망극합니다요."


"또 지랄이네. 술에 쩔어 살더니만 멘트도 젓갈 같네. 야. 아무튼 다른 게 아니라 너 혁진이 알지?"


"어 알지. 나 그 새끼 때문에 돈 날린 거 생각하면 아직도 빡쳐서 소주 한 병 먹을 거 두 병 먹게 돼. 근데 왜?"


"걔네 어머니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거든. 나도 지금 연락받았어. 이따 퇴근하고 장례식장 갈 건데. 병원이 너희 집 근처더라고. 그래서 너도 같이 가자고."


혁진은 고등학교 동창 중에 하나였는데 희강의 사업이 한창일 때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서 주식투자에 관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때 혁진이 추천해 준 미국 정유회사에 꽤 큰 금액을 투자했다가 얼마 안 가서 중동 쪽에 위치한 공안국과 연안국끼리 전쟁으로 인해 국제 유가가 폭락하면서 주가가 반토막이 났고 투자금액을 회수하지 못한 채 큰 손실을 봤다. 원금의 일부라도 회수하고 싶었지만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주식차트에 그저 멍하니 호가창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손 쓸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목돈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이 상황에 열불이 나서 어딘가에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 분노를 아무 데도 데려갈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 그저 어긋난 판단만 되풀이하는 자신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 내가 뭐 하러 가.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 부근이면 저녁에 너 거기 갔다 와서 근처에서 따로 만나서 소주나 한잔하자 오랜만에."


"별로 안 친했나? 그럼 안 가는 게 맞지. 야. 나 일찍 퇴근하고 조문하면 7시쯤 될 듯. 병원 근처 상업지구에서 보자."


"그래 그럼."


"아니, 근데 혁진이 좀 충격받았나? 말투가 좀 이상하더라고."


"왜? 말을 잘 못해?"


"그게 아니라. 어머니 돌아가신 걸. 그 여자가 죽었어.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자기 어머니 보고 그 여자라고 칭한 거지?"


"그렇지. 근데 그 말이 참.. 뭐랄까.. 친숙하다고 할까? 걔 입에서 그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뭔가 어른 같더라. 나 형이라고 할 뻔. 내가 좀 이상한 건가?"


"응, 사무실 차리고 돈 좀 벌더니만 머리가 어떻게 된 걸 수도 있지."


학만과 통화를 마치고 그 여자라는 말이 한동안 입에 머물렀다. 그 여자. 그 여자. 그 여자가 죽었어.

희강의 입에는 도통 잘 붙지 않았다. 관념과 언어가 결속이 안 되는 것처럼.

눈을 떠서 꿈을 기록하고 학만과 통화를 하고 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라면이나 하나 끓여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선반에서 라면봉지를 꺼냈을 때 식탁 위에 쪽지가 보였다.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어머니의 메모가 식탁유리에 붙어있었다.

'냉장실에 추어탕 있으니 데워먹거라. 밥통에 밥은 아침에 지은 거라 바로 먹어도 된다'

희강은 라면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공허한 한기가 퀴퀴한 냄새를 묻힌 희강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희강은 저녁 6시 30분에 학만과 만났다. 장소를 잡은 건 학만이었다. 6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초로의 여자가 운영하는 노포 형식에 실내포장마차였다. 둘은 고갈비와 계란말이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조우한 둘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매일 먹는 소주이지만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마시는 독하고 싼 술은 둘 사이를 금세 추억으로 물들였다. 몇 번 짠을 하고 한 병을 거의 다 마셨을 무렵에 학만이 입을 뗐다.


"근데 아까 혁진이가 자기 어머니 돌아가신 걸 그 여자가 죽었어라고 말한 게 친숙하게 느껴졌다고 그랬잖아. 그게 왜 그런 지 알았어."


"뭐 때문에 친숙하게 느꼈는데?"


"내가 회사운영하면서 제일 많이 한 게 심리학 공부거든. 사람들 심리를 알아야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강의 같은 걸 많이 봤는데. 거기서 어떤 강사가 그런 말을 하더라. 부모에게서 정서적 독립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라고. 그래야 자기 욕망이 뭔지 보이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부모를 사회의 개체로 바라보고 명사로 칭할 때 그때 어른이 된 거라고."


"뭔 개소리야 그게."


"어휴, 무식한 새끼. 그니까 부모를 그냥 타인 보듯이 남자, 여자 이렇게 인식하게 되면 인간으로서 연민을 갖게 된대. 너 생각해 봐라 지금 어머니 덕에 네 몸하나 건사하는 거잖아. 근데 입장을 바꿔서 네 옆에 먹여 살릴 누가 딸려있으면 존나 힘들 거 아니야. 근데 정서적 독립을 하면 아 불쌍한 이 사람을 내가 도와줘야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면서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한 개인으로서 살 수 있다는 거지."


"아니, 우리 엄마 평소에 일 잘 나가시고 맨날 나 밥 차려주시면서 웃으시던데."


"철없는 새끼. 그건 당연한 거지. 어머니는 최선을 다하고 계신 거야. 그러다가 너 어머니 갑자기 사라지면 너 혼자 어떡할래?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것도 물론 중요한데, 본질은 결국 우리는 혼자 살아내야 한다는 거야."


"이 새끼 돈 벌더니만 혼자 어른인 척 다하네. 어휴, 꼴 보기 싫어."


"희강아. 나는 너를 정말 하나뿐인 친구라고 생각한다. 네가 정말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러니까 오해하지는 말고 들어줘. 정말 미안한 소리지만 넌 아직 어른이 안된 거 같아. 네가 정말 무서워해야 할 건 네 수중에 있는 몇천만 원의 빚도 아니고 희망 없어 보이는 내일도 아니야. 네가 성장의 고통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서 그 고지서가 네가 모르는 때에 언제든지 날아올 수 있다는 거야. 살아가기 위한 대가 같은 거. 그걸 지불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더라."


"에휴, 몰라 새꺄. 우울한 얘기 그만하고 오뎅탕이나 시키자. 이모. 여기 오뎅탕 하나요."


학만은 텅 비어버린 희강의 소주잔에 소주를 한가득 따라주었다. 그 술을 마신 희강은 이곳의 중력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둘은 헤어졌다. 학만은 아직 지하철이 다닌다면서 급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멀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희강은 집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30분 정도 걷자 동네 어귀에 들어섰다. 술기운이 싹 달아나 버린 탓에 집 앞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갈까 했지만,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가 생각나서 발걸음을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저 왔어요."


"어, 왔어. 아들."


TV에서는 지상파 채널이 아닌 지역방송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앵커는 술에 취한 아들이 잔소리하는 노모를 살인한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니, 뭔 저런 걸 봐요."


"응, 아니 채널 돌리다 보니까. 밥은?"


"먹고 왔어요. 저 먼저 들어가요. 쉬세요."


희강은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군데군데 뜯어진 벽지를 바라보며 어른에 대해서, 독립에 대해서 생각했다. 세월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정직하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을 탓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그것이 그나마 나잇값을 하는 거라고 믿어왔다. 그동안 살면서 나잇값을 못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봐온 탓에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자 그럼 된 것 아닌가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던 지난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어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닌 건가?' 희강의 가슴속에 뜻하지 않은 의혹이 생기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흔 살이 넘은 내가 어른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인가. 결코 청년이라고 부를 수 없고 중후한 중년이라고도 부르기 애매한 자신을 명명할 호칭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학만이 말한 살아가기 위한 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살아가는데 대가를 꼭 치러야 하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다. 이미 손에 쥔 빚도 있고 내 몸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무슨 대가를 바라는지. 꼭 그 몫을 가져가야만 하는 무정한 세상에 갑자기 치가 떨렸다.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면 절망 속에 빠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절망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은 이 시점에 자신의 발치에 놓여있는 삶의 유형이 불협화음에서 비정한 장르로 변주되고 있다는 걸 들려주는 것 같아서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오랫동안 방치 된 저수지에 썩은 물이 고여있는 것처럼 가슴속에 고여있던 부패된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오빠. 나 아진인데, 잘 지내지? 사업 잘 되구? 모해?


전 여친 아진에게 메시지가 온 걸 확인한 희강은 문자에서 희미한 가능성의 냄새를 맡고 곧바로 답장을 했다.


나 잘 있지. 넌? 별일 없어? 야. 오랜만에 연락하니까 보고 싶다.


그다음 아진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하고 희강은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응. 다른 게 아니라 오빠. 나 돈 좀 빌려줘 100만 원만 급해서 그래. 다음 달 중순에 꼭 갚을게.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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