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을 은혜로 포장한 비유들
우리는 흔히 예수의 비유를 따뜻한 이야기, 교훈적인 우화로 기억한다.
그러나 모든 비유가 그렇게 순결하지는 않다.
일부 비유는 불편하다.
그 속에는 불평등과 불의한 구조를 신성화하는
위험한 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비유는 언제나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때로는, 현실의 불의를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주인은 세 명의 종에게 각각 5, 2, 1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다.
5와 2를 맡은 종은 장사를 해 이익을 남겼고, 1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었다.
돌아온 주인은 이익을 남긴 종을 칭찬했고, 돈을 묻은 종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전통적인 해석은 익숙하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잘 활용하라.”
그러나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이 주인은 사실상 고리대금업자다.
달란트는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자본이다.
이윤을 남기지 않으면 무능한 자가 되는 구조.
그런데 한 종은 그 부당한 시스템에 협력하지 않는다.
그는 돈을 땅에 묻음으로써, 착취의 고리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저항을 택했다.
예수는 가진 자가 더 부유해지고, 없는 자가 더 빼앗기는 구조를 폭로했다.
그러나 복음서의 편집자는 그저 ‘게으른 종의 실패담’으로 바꿔버렸다.
이 비유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예수가 왜 세상 권력에 의해 버림받았는지를 암시하는 자기 서사일지도 모른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던 청지기가 해고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채무자들을 불러 빚 문서를 고친다.
“100 석은 50으로, 100 말은 80으로.”
교회는 이를 “지혜롭게 재물을 사용하라”는 비유로 설교하지만,
역사적 맥락은 훨씬 현실적이다.
고대 유대 사회의 채무는 원금보다 불어난 이자가 더 컸다.
주인은 이미 원금을 회수했지만 남은 채권은 사실상 회수 불가능한 부채였다.
청지기가 그 빚을 줄여줌으로써 불가능한 채권이 ‘현금화’될 수 있게 되었다.
주인은 그것을 칭찬했다.
도둑질은 여전했지만, 이번엔 계산이 더 세련되었다.
큰 도둑(주인)과 작은 도둑(청지기)이 서로의 이익을 챙기는 동안,
빚진 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남았다.
예수가 말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교훈이 아니라 풍자였다.
착취의 구조 속에서 ‘지혜롭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하게 들리는지를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극장이다.
아침부터 일한 자와 오후 늦게 온 자가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긴 시간 땀 흘린 품꾼들은 불평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왜 저들과 같은 임금입니까?”
그러자 주인은 냉정하게 답한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지 못하겠느냐?”
교회는 이 장면을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다”는 설교로 풀이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의 불만은 정당하다.
그는 마치 노조위원장처럼 동료들의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주인은 노조 탄압자처럼 그 항의를 눌러버린다.
결국 강조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절대 권력의 논리다.
그의 말 한마디가 임금을 결정하고, 그의 뜻이 곧 정의가 된다.
이 비유는 천국의 평등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불평등이 어떻게 ‘은혜’로 포장되는지를 드러낸다.
세 비유의 공통점은 하나다.
항상 주인과 종,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도가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과 부자는 늘 하나님으로 비유된다.
하지만 그들이 고리대금업자이자, 도둑이며, 노동자를 침묵시키는 자라면?
그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인가?
예수의 비유는 원래 하나님의 나라를 빙자한 인간의 불의를
풍자하고 폭로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풍자는 권력의 언어로 바뀌었다.
예수의 이야기는 권력자를 정당화하는 설교로 변했다.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있는 자를 더 부유하게 하고, 없는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들며,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항의를 억누르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예수의 본래 메시지는 달랐다.
그는 그 불의한 주인들과 싸웠고, 착취의 구조를 향해 비유의 칼날을 겨눴다.
예수의 비유는 권력의 미화가 아니라, 불의의 해부학이었다.
그의 비유 속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군림하는 인간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