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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pr 26. 2023

한줄평에 대한 평론

남을 비평하는 것에만 익숙한 너에게 비평을 드린다

웬만하면 브런치에 쓴소리는 별로 담고 싶지 않았는데, 유튜브를 보다가 많은 관객들이 감명 깊게 봤다는 (나도 꽤 재밌게 본) 영화를 그저 너절하다고 표현한 한 평론가를 보고 확 짜증이 일었다. 이에 많은 평론가들이 애정하는 한줄평에 대해 비평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작가가 시놉시스를 쓸 때 일반적인 양식이 있다. 로그라인, 기획의도, 주제(주제는 기획의도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인물 소개, 줄거리. 보통 이런 항목들을 채워 넣는데 이 로그라인이라는 게 참 재밌다. 로그라인은 웬만하면 한 문장으로, 간결할수록 좋고,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들을 포함시켜 주는 것이 좋다.

그래서 보통 '어떤 소재를 이용해서 어떤 메인사건을 다루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런 형식을 띤다.

예를 들어,

'채권추심을 하다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사채업자의 순애보.' 가 로그라인이라면,

사채업이라는 소재와 채권추심이라는 메인사건과 순애보라는 장르(멜로)와 사랑으로 인해 삶을 돌아보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주제의식이 들어가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시놉시스를 읽는 사람(대체로 제작사, 배우, 투자자)은 이 드라마가 어떤 드라마가 될 것인지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되고 이게 대중들에게 후킹이 될 것인지, 손익분기를 넘을 수 있을지, 상업적이지 않더라도 작품성으로 승부를 볼 수 있을지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게 된다. 이렇듯 로그라인이라는 한 문장은 그 작품의 핵심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하기에 작가는 자신이 쓰는 글을 확실하게 통달하고 있어야 보는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로그라인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 한줄평이라는 것을 싫어한다. 비전문가인 관객들도 자신이 재밌게 본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얘기할 때 한 줄로 말하는 경우가 없는데, 평론을 한다는 사람들이 한줄평이라는 것을 트렌드화 시켜버렸다는 것에 굉장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해당 예술을 비평하는 시각이 전문화되어 있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그림 한 점, 음악 한 곡, 영화 한 편, 드라마 한 편을 한 줄로 평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더 잘 알 터인데 내가 지금껏 읽어본 한줄평에는 영화를 특징할 수 있는 포인트도, 평론가 본인의 비평에 대한 핵심도 없다. 대부분 비평이 아닌 ‘감상’을 나름 미학적인 한 문장으로 썼을 뿐인데, 비평이 아닌 감상을 쓰는 건 일반 관객의 몫이지 평론가라면 전문성을 좀 갖춰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자기가 쓰는 드라마의 로그라인 한 문장 만드는데도 이토록 애를 먹는데, 해당 작품뿐만 아니라 본인의 비평까지 압축한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제대로 된 평론가라면 스스로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 한줄평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은 뭐든지 간단한 요약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트렌드(혹은 문해력)의 영향도 단단히 한몫했을 것이다. 게시판 댓글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3줄 요약 ㄱㄱ' 뭐 이런 거.


한줄평이라는 단 한 줄에 영화에 대한 정보나 평론가의 비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평론가의 ‘감상’에 글빨을 더한 것인데, 대중들이 한줄평을 즐기는 이유는 촌철살인처럼 보이는 문장이 가진 미학 때문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 중에 일부는 이 기발한 문장에 공감하며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영화에 대한 정보나 개인적인 감상이 없는 영화를 안 본 사람들에게도 재치 있는 한 마디가 주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대중들이 다양하게 소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줄평은 컨텐츠로서 가치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전문적인 평론가가 쓴 있어 보이는 이 한 문장은 그 작품을 선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전문적’인 정보가 된다. 알고 보면 전문적이랄 게 전혀 없는, 작품이나 비평에 대한 정보 전달조차 제대로 안 되는 관념적인 ‘감상’ 한 줄일 뿐인데. 만약 비전문가인 일반 관객이 쓴 한 문장이라면 취향차이라고 느끼고 넘어갈 이 한 줄 감상은 평론가가 쓴 한줄평으로서 전문성이라는 프레임을 입는다. 재밌게 소비할 수는 있으나 작품을 선택하는 데에는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는, 때때로 대중들의 선택에 유해한 영향을 끼쳐서 해당 작품에 관계된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이 한 줄은 그래서 불량 식품이 된다. 맛있지만 몸에는 안 좋은.


하지만 이 한줄평이 가지는 컨텐츠로서의 힘은 강력하다. 한줄평이라는 컨텐츠가 정착되면서 사람들은 한줄평을 이렇게 저렇게 변형시켜 인용하고 재생산하고 밈으로 만들며 재밌게 즐긴다. 이 과정을 통해 대중들은 평론이라는 장르와 친숙해진다. 덕분에 요즘은 평론가들도 개인 채널을 개설해 셀럽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평론을 굳이 찾아보지 않는 시대에 이만큼 갭을 좁힐 수 있는 컨텐츠를 개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짧은 단 한 문장으로 대중들이 하나 둘 평론을 찾아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관객과 창작자와 작품의 수준도 그만큼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줄평이 가지는 선순환 역시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 불량 식품인 줄 알았는데 장복하면 건강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 불량 식품을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하고 소화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평론가들의 존재 이유는 예술의 건강한 발전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영감에 치우쳐 시야를 놓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라는 존재는 예술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시야로 지금 이 시대에 예술이 가야 할 길, 예술가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를 짚어주는 동반자가 되어줘야 한다. 대중들이 너도 나도 재밌게 본 영화를 가지고 나 공부 많이 했고, 많이 봤고, 그래서 수준 높은 사람이야. 니들이 재밌게 봤어도 내가 재미없었으니 이건 니들 수준이 낮은 거야. 혹은 재밌었다고 착각한 거야. 라는 식으로 비평을 하는 평론가들이 꽤 많은데,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만함은 그 작품을 만든 창작자는 둘째 치고, 그 작품을 재밌게 본 사람들을 싹 다 무시하는 관객 모독이다. 나한테 재미없었어도 대중들이 재밌게 봤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예술적으로, 필요하다면 사회적, 사상적, 이념적으로 시대의 시류와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 봐야 하는 게 창작자와 평론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만약 대중들의 취향이나 예술의 지향성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창작자들이 작품을 통해 세상에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다 못해 추천할만한 좋은 작품이라면 대중들이 작품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유도할 수 있는, 예술적으로 지양해야 할 작품이라면 작품에 대한 본인의 비평을 찾아보게 할 수 있는, 최소한 그 정도 목적성이라도 있는 한줄평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요즘 한줄평들을 보면 영화나 비평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한줄평이 가진 재치나 미학, 그 자체를 빛나게 하려는 노력 밖에 보이지 않는데, 예술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자신의 비평으로 창작자를 돕고 함께 하겠다는 생각은 1도 없이 그저 있어 보이는 한줄평에 매달려 평가자의 권위와 평론의 대중화만 외친다면, 완성도 없는 작품만 쓰면서 인기 많은 배우에게만 의존하려는 창작자와 다를 게 없다. 그런 평론가와 창작자만 존재하는 세상에 르네상스를 기대할 수 있는가.


예술과 창작자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진 평론가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평론가라면 한줄평이라는 게 얼마나 날카로운 양날의 검인지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난 한줄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미 정착한 한줄평이라는 컨텐츠를 마냥 거부하기보단, 그 한 줄에 좀 더 직업적인 책임감을 실어주기를 바란다. 이에 천재 예술가이자 공학자이기도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겼던 한줄평에 대한 한줄평을 소개해주고 싶다.


‘단순함이야 말로 궁극의 정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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