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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나 Jul 09. 2024

7. 나는야 뚜벅이 보부상 요양보호사

  뚜벅뚜벅 걷다 보면 문득 힘든 날도 있는 거지 뭐.

동생들이 요양원에서 고정적 쉬프트를 받으며 일을 할 때 나는 널싱홈 (nursing home) 에이전시 (agency)와 홈케어 (home care) 에이전시를 병행하며 요양보호사로 첫 일을 시작했다. 에이전시의 첫 시작은 홈케어 에이전시가 먼저였는데 홈케어 에이전시는 이 프로그램과 연결된 호주 현지 사무소에서 소개를 해준 곳으로 말 그대로 환자분들의 집을 방문해서 환자가 필요로 케어를 제공하는 업무였다. 이 업무에는 청소부터 음식준비, 토일렛팅 (toileting), 샤워링 (showering), 피딩 (feeding) 등과 같은 환자분과 관련된 모든 전반적인 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 같은 경우 홈케어 에이전시에서 하루에 짧으면 한 시간에서 최대 세 시간까지 일을 받았는데 고정적인 쉬프트였으나 하루에 일을 하는 시간이 짧았고 일주일에 받는 쉬프트도 몇 개 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일을 하는 시간은 다 합쳐서 겨우 열 시간 정도였고 열 시간 일을 하는 것은 시드니 방값과 공과금을 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홈케어 쉬프트 사이사이를 채워줄 수 있는 널싱홈 에이전시 또한 시작하게 되었다.


홈케어 스케줄은 고정적이어서 좋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시작 시간과 끝나는 시간이 쉬프트마다 달랐고 또 이동시간 때문에 널싱홈 쉬프트를 받기에도 애매한 날들이 많았다. 일을 하는 중에 널싱홈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오면 클라이언트한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거나 또는 몰래 받거나 아니면 전화를 받지 못해서 쉬프트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쉬프트가 없는 줄 알고 홈케어를 마친 후 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와서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갑작스레 출발한 적도 많았고, 짐에서 운동하는 중에 전화를 받고 운동을 멈추고 일을 하러 간 날도 많았다. 그래서 점심, 저녁을 굶고 일을 하러 가기 일쑤였고 운동을 하다가 땀이 난 운동복 바지를 입고 일을 갔다가 RNIC (Registered Nurse in charge) 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짐에서 운동하다가 쉬프트를 받고 바로 출발한 것이며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급하게 와야 했다고 상황 설명을 했지만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심해 달라고 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쉬프트를 받고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점심, 저녁 도시락과 유니폼 및 운동복과 같은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방에 챙겨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에 연락이 오면 집에 들르지 않고 홈케어가 끝난 장소에서 바로 싸 온 도시락을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주로 도시락은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잼이나 크림치즈를 바른 빵, 삶은 달걀, 바나나, 사과 등을 가지고 다녔다. 어떤 때에는 혹시나 연락이 올까 클라이언트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앉아 연락을 기다리며 도시락을 까먹기도 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살 수도 있었지만 내가 일을 하는 곳은 대부분 외지나 주택가였기 때문에 주변에 먹을만한 음식을 살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고 요양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도 길면 두 시간에서 세 시간까지도 걸려서 어디를 들러 뭔가를 사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시간에 쫓겨 늘 구글맵을 켜고 뛰어다녔던 기억만 가득하다.


이동시간이 긴 이유는 먼저 호주 땅 자체가 크기도 하고 도심에 있는 요양병원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호주 대중교통은 우리나라만큼 잘 돼있지는 않아서 버스 배차 시간이 정확하지 않고 버스 노선이 갑자기 바뀌어서 중간에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내려야 하는 날이 빈번했다. 트레인의 경우 중간에 트레인이 멈춰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 갇혀있다가 결국 승객들 모두 내려야 했던 날도 있었다. 환승 두세 번은 기본이었고 환승 버스를 타려고 최소 30분 길게는 한 시간을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또한 어떤 날은 환승버스를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 버스가 갑자기 구글맵에서 사라지면서 다른 버스로 대체되어 환승버스만 두 시간을 기다렸던 적도 있다. 네 시간 쉬프트를 가는데 두 시간을 길에 버린 적도 있었고 버스정류장을 찾느라 으슥한 숲길을 홀로 지나가기도 했다. 정류장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정류장이 있기도 했고 한겨울에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정류장에 서서 한 시간을 넘게 버스를 기다리며 혹시나 너무 어두워 나를 보지 못하고 버스가 지나칠까 봐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기다리기도 했다.


[버스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를 담은 사진 - 플래시를 켜고 버스를 향해 흔들었던 어느 날 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는데 이 날은 아침 7시에 팻 할머니집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팻 할머니 집을 방문할 때에는 버스 배차 간격 때문에 늘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당연히 할머니네 동네도 일찍 도착하여 바깥에서 40분 정도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한국에서 겨울 파카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상태여서 집에 있는 두꺼운 옷들을 최대한 껴입고 출근을 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유독 일찍 도착해서 바깥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해는 아직 뜨지도 않은 새벽녘 하늘은 푸르스름했고 간밤에 비가 와서 땅도 공기도 축축하고 차가웠었다. 그래서 그럴까 이 날따라 코끝은 또 얼마나 시리던지. 시린 코를 한 손으로 가리고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 길목을 계속 왔다 갔다 걷다 보니 문득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고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스치며 괜스레 서러워졌다.


걸었던 길을 반복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지금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가려는 길은 또 어딘지와 같은 질문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던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 내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는데 왜 다 그만두고 와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러다 나중에 후회하는 건 아닐지 그리고 1년 뒤에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는 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와 같은 잡생각과 물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길가에 있던 어느 이름 모를 성당 앞에 멈춰 서서 그냥 나는 아직 아무거도 모르겠고 시작했으니 일단 하고 보자 그러다 언젠가 또 다른 길이 보이겠지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무겁게 가라앉은 내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나는 문득문득 올라오는 아직은 희미한 내 앞날에 대한 불안함을 눌러가며 꾸준히 에이전시 일을 했고 일을 하다 보니 다행히 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조금씩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에이전시를 통해서 만난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받은 응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당시 시급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차라리 레스토랑에서 조금 더 몸도 마음도 편하게 남은 6개월 동안 일을 했어도 됐을 텐데 이 당시에는 아무거도 모르기도 했고 나는 여기 요양보호사를 하러 왔으니까 요양보호사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때의 경험과 버텨냄이 간호 유학 생활에 꽤 도움이 되었고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며 어르신들에게 받았던 격려는 나를 더 한 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특히나 기억에 남는 몇몇 에피소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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