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럭키걸 (lucky girl).
베티 (가명) 할머님은 내가 하던 홈케어 (Home care - 가정방문요양/간호) 고정 클라이언트셨다. 1주일에 한 번 매주 월요일 아침 베티 할머니 집을 방문해서 약 두 시간가량 할머니를 도와드렸다. 베티 할머니께서는 할머니의 언니인 로즈 할머니와 그리고 매우 연로하신 어머니와 한 집에 살고 계셨다. 유일하게 건강한 베티 할머니의 언니인 로즈 할머니께서는 베티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돌보는 가족의 유일한 보호자셨다. 베티 할머니는 파킨슨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셔서 집안일과 같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셨고 로즈 할머니 혼자 다 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준 업무는 주로 베티와 로즈할머니네 집안일을 도와드리는 것이었다.
여덟 시 정각에 대문을 노크하면 항상 로즈 할머니께서 문을 열어주심과 동시에 포옹과 볼키스를 하며 맞이해 주셨다. 인사를 마치면 나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 가방과 외투를 벗어두고서 1층 청소기 돌리는 일부터 먼저 시작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나면 소파 옆에 쌓여 있는 빨래들을 다림질하여 개키고 또 다른 여러 가지 집안일들을 하였다. 그 후 베티 할머니께서 일어나 샤워를 끝마치시면 나는 욕실로 들어가 수건으로 닦아드리고 샤워실 뒷정리를 하고 나왔다. 할머니께서는 흡연자이셨는데 집 뒷마당에서 종종 담배를 피우곤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나가 할머니 옆에서 담배를 다 피우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비흡연자가 담배냄새를 맡으며 옆에서 기다리기에는 사실 조금 힘들었다. 특히나 할머니께서는 한 대만 태우시는 게 아니라 한 번 나가시면 서너 까치 줄담배를 피셨다. 조금 떨어져 서 있긴 했지만 할머니가 넘어지실 수도 있기 때문에 너무 멀리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시면 집으로 들어와 식사를 하시거나 내가 일 하는 동안 옆에서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고 어쩔 땐 또 할머니 방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내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 할머니께서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베티 할머니 방에 물건이 너무 많이 쌓여있는데 정리를 해야 할 거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그날은 할머니 방 정리만을 두 시간가량 했다. 베티 할머니 방은 마치 보물 찾기를 할 수 있는 골동품 가게 같았다. 다양한 액세서리부터 옷, 신발, 가방, 잡동사니 물건들로 쌓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젊은 시절 옷장사를 하셔서 패션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고 그래서 이렇게 옷과 신발이 쌓여있는 거라고 하셨다. 지금은 파킨슨으로 인해 편한 옷을 위주로 입어야 하고 예전에 입던 옷들과 신발들도 다 맞지 않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쌓아 두었다고 하셨다. 얼마나 오랜 시간 쌓여있었는지 침대 밑에서 신발들을 옮기는데 아주 오래된 케케묵은 먼지덩어리들이 굴러 나왔다. 먼지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마스크 없이 무방비상태로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재채기를 연신해 댔다.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들과 신발 그리고 서랍 곳곳에 가득히 숨어있던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들, 쓰레기들 녹슨 액세서리들을 쓰레기통에 담았고 입을 수 있는 옷들은 옷걸이에 걸고 바닥에 있던 옷들도 다시 정리하여 빈 공간이 생긴 옷장에 차곡차곡 넣었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정리하던 중 할머니께서 까만 에나멜 악어가죽? 뱀가죽? 무늬와 같은 패턴이 들어간 굽이 낮은 구두를 보여주시며 내 발 사이즈를 물어보셨다. 240 정도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 발도 마찬가지라며 지금은 파킨슨 때문에 발가락이 다 구부러지고 휘어서 못 신지만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신이라며 신어보라고 하셨다. 발을 집어넣자 마치 내 신발 마냥 발이 쑤욱하고 들어가자 할머니께서는 네가 바로 신데렐라였다고 말씀하시곤 환하게 웃으셨다. 그러고선 이 신발이 이렇게 너에게 딱 맞는 게 내가 이 구두의 주인이 될 운명이라 여태 이렇게 있었던 거 같다며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물론 구두를 잘 신지 않기도 하지만 할머니께 소중한 물건이고 새 구두이기도 해서 극구 사양하며 할머니께서 신지 못하시더라도 간직하셨으면 좋겠다고 몇 차례 말씀드렸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나이 들고 병들어 신지도 못하던 신발이었는데 내 발에 꼭 맞는 게 더없이 예뻐 보인다며 아깝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선 나에게 럭키걸 (lucky girl) 운이 좋은 소녀라며 이 신발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덕담과 함께 신데렐라 구두를 내 가방에 꾸역꾸역 집어넣어 주셨다. 그리고 자기를 케어해 주러 매주 와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서른의 시작,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투명했던 내 앞날이 저 순간만큼은 할머니의 덕담이 깃든 신데렐라 구두만 있다면 내 앞날도 그렇게 불투명하진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병마와 싸우며 삶의 끝자락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환자들/어르신들로부터 받는 위로와 고맙다는 한 마디 그리고 무한한 응원과 격려는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나에게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 이것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크고 감사한 것이었다.
할머니께 신데렐라 구두를 받은 지 이미 6-7년이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신지 않은 새것의 상태로 내 신발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간호사가 된 지금은 일이 너무 지쳐 가끔은 내가 로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할머니께서 주신 신데렐라 구두를 보면 그때의 마음과 다짐이 생각나며 마음을 다 잡게 된다.
앞으로도 내가 가야 할 길로 좋은 길로 인도해 줄래? 내 럭키슈즈 (lucky 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