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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시의 비극적 사랑

퇴사하고 발레학원 1

3년 전에 다니던 발레학원에서, 하루는 원장님이 나를 보고 감탄했다.


이 뻐시 좀 봐!



뻐시(?)란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그런 말 처음 들어봤다.


하지만 안다. 우리는 콘텍스트로 새로운 단어를 배울 줄 아는 모국어 화자가 아닌가? 나는 말도 안 되게 뻣뻣한 몸으로 다리를 찢고 있었으므로 원장님이 말한 뻐시(?)는 뻣뻣한 인간을 칭하는 말이다. 그렇다. 여러분, 나는 지구에 다신 없을 뻐시(?)다.




반비례도 없는 몸뚱이


잘은 몰라도 내가 아는 한 발레를 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신체능력은 유연성과 근력이다. 그리고 대체로 이 두 가지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아 유연한 사람은 근력이 부족하고 근력이 센 사람은 유연성이 떨어진다고 들었다.


근데 반비례 관계라면 둘 중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게 내 평생 동안의 불만이다. 유연성과 근력 둘 다 없는 사람이 있다. 나다!


어느 정도 심각하냐면 난 초등학교 때까진 윗몸일으키기를 시키면 누워서 아예 일어나지를 못했다. 게다가 평생 가장 유연한 시기인 유년시절에 발레학원을 5~6년씩 다녔는데도 다리를 일자로 찢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뻣뻣하면 근육이라도 많든지, 힘이 없으면 유연하기라도 하든지. 뻣뻣한데 매가리도 없다. 아이고 난 어쩌다 이런 몸을 가지게 되었나!


아무튼 발레를 하기에 최악의 운동능력을 가진 나는, 한때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여 일치감치 꿈을 포기했다.


그런 내가 30대 초반이 되었으니 그땐 얼마나 터무니없는 각도로 다리를 찢고 있었을까? 원장 선생님은 평생에 처음 보는 뻐시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친 것이다. "이 뻐시 좀 봐!"




그런데 어쩌다 발레를?


모든 사랑엔 비극적 면모가 있다. 지구 최강 뻐시로 태어났는데 춤추는 건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도 약간은 그렇다.


난 운동을 위한 운동을 잘 견디지 못한다. 일정한 고통을 주어 몸을 단련하는 그 자체만 목적인 반복 동작을 잘 못 견딘다. 그래서 헬스 같은 운동이 정말 안 맞는다. (견딜 수 없는 노잼...) 오래전 요가학원도 다녀보았지만 수업시간 1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바람에('나는 왜 여기서 벌을 받고 있는가?') 두 번째 달을 등록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대신 춤을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춤을 추는 건 재밌다.


성인이 되고도 취미로 발레학원을 간간히 다녔다. 물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몇 개월씩 다니다가 시간, 돈, 건강 등이 여의치 않을 때 그만두곤 했기 때문에 성인이 되고 학원을 다닌 기간이 합쳐서 얼마 되진 않는다.


20대 중반이 되면 몸의 무료 구독기간이 끝난다던데, 그래서 규칙적인 운동으로 구독료를 내야 한다던데. 난 벌써 30대 중반이다. 회사 다니면서 운동은 안 하고 엉망진창으로 살아서 몸뚱이에 진 빚이 산더미다. 퇴사 후에 아무것도 안 하고 놀더라도 내 목숨이랑 관련된 운동 빚은 갚으면서 놀아야 했다. 그래서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몇 번째 학원이지? 글을 쓰다 되짚어 보았다. 역대 최단 3주 만에 탈주한 학원까지 모두 포함하면... 이번이 일곱 번째 학원이 되었다.




이번 생엔 틀렸지만


내가 어렸을 식초를 마시면 유연해진다는 루머가 있었다. 그땐 발레학원을 다니면서 나만 스트레칭이 안 되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부엌에 있는 식초를 마실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때 울면서 식초를 안 마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건 과학적 근거도 없는 헛소리인 데다가 나는 식초 드링킹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왕뻐시였으니까. 어차피 넌 그걸로 안 된단다 얘야.


이젠 지망생 같은 게 아닌 취미 발레인으로서 내가 선망하는 것은 그저 평균만큼만 유연한 몸이다. 항상 생각한다. '평균만큼만 유연했더라면.' 평균만큼만 유연한 사람들을 학원에서 항상 본다. 그들은 꾸준히 발레를 하면 대체로 1~2년 사이 다리를 일자로 찢는다. 예전에 발레 선생님한테 듣기로는 발레의 대부분의 동작을 구현하려면 (180도 일자 스트레칭은 아니어도) 150도 이상은 찢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제 더 뻣뻣해진 나는 겨우 110도 정도 찢는 게 전부다. 그마저 뻣뻣한 만큼 웜업 시간도 오래 걸려서 수업 전 제일 먼저 도착해 천천히 근육을 달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게 유연성이란 건 이번 생엔 틀렸고 다음 생에나 바라볼까 한 능력이다. 그러니 이 뻐시가 춤을 좋아하는 마음엔 항상 조금의 비극이 깃들어 있다. 그래도 아무튼 30대 중반에 몸뚱이 구독료는 내야 하고 헬스나 요가는 싫으며 춤추는 건 좋으니까, 발레학원을 또 간다.


그래서 뻐시는 발레학원에 또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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