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발레학원 3
공공기금 지원을 받아서 공연을 하려다 보니 이번 10월은 지원서의 달이 되었다. 내년에 진행되는 각종 지원사업의 신청 마감이 10월 말에 몰린 것이다. 이 말인즉슨 지금 내 주변의 젊은 연극인들이 다들 무언가를 위한 지원서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나도 지원서를 쓰고 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다시 새삼스럽게 하는 말인데, 연극을 하기 위해 때마다 ‘지원서’를 쓰는 일은 정말 거지같다. (순화해서 ‘거지같다’고 표현해보았다.) 지원서의 문항에 답하려면 나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날 부풀려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예술인으로서의 나의 역량을 적절히 평가받는 방식일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빈칸을 채우기 위해 되도 않는 대답을 지어낸다. 예를 들면 당장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가 ‘내 작품이 예술계에 미칠 영향’ 같은 걸 확신 있는 어조로 써야 하는 것이다. 혹은 지금까지 일궈온 ‘예술적 성취’가 무엇인지 써야 하거나, 아직 쓰지도 않은 작품의 캐스팅과 홍보 계획까지 포함해 2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꾸역꾸역 채워야 한다. 이런 페이지를 내 영혼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채우고 나면, 보통 몇 달 뒤 아무런 보답 없이 탈락하고 만다.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자존감은 급강하한다. 지원서 대신 완성된 희곡으로 공모전에 도전하는 일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때로는 정서적 소진 때문에 각종 지원서 쓰기를 잠시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잠시 쉬는 것은 괜찮지만 결국 젊은 작가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다양하지 않아, 지원서 쓰기로 돌아가게 된다.
예술인이 아니더라도 한국 청년들은 대체로 이런 감정을 익숙하게 이해할 것이다. 왜냐면 이건 수십 편의 자소서를 써야 하는 취업준비생의 자존감 하락 메커니즘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원서는 정말로 쓰기 싫다.
하지만… 어쩌겠나? 난 너무 싫은 어떤 일을 또 해야 한다. 회사를 다니면 다니는 대로, 취업준비를 하면 하는 대로, 프리랜서 예술인으로 살면 사는 대로, 자영업자로 살면 사는 대로 각자의 괴로움이 존재한다. 요컨대, 직업인으로서, 우리 각자는 남들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자기만의 싫은 몫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난 회사 생활의 싫은 부분을 증오하며 퇴사를 했고, 내겐 전업 예술인의 싫은 부분이 회사의 싫은 부분보단 낫다는 판단이 섰고, 그렇다면 이제 전업 예술인의 싫은 부분을 참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차례인 것이다.
그리고 난 이제 이걸 일종의 내 몸뚱이 들어올리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주엔 발레 학원에서 처음으로 레벨 3 수업을 들었다. 레벨 3 수업에선 일단 선생님이 짜주는 순서 자체가 어렵다 보니 정신을 잠깐만 놓아도 순서를 틀렸다. 그날 유독 순서를 틀릴 때마다 우뚝 멈춰서는 수강생이 한 명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다른 수강생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순서를 틀려도 자꾸 따라 해야 한다고. 그냥 플로어에서 멍 때리면 발레를 배울 수 없다고. 요는, 발레는 어쨌든 몸으로 배우는 것이고, 틀려도 일단 계속 따라 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발레를 배우는 방법이니 용기를 내라는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멈춰 서던 그 수강생은 이런저런 이유를 말했다. 너무 어렵다거나, 원래 순서를 잘 못 외운다거나, 자신의 실력은 그 정도가 안 된다거나…. 사실 맞는 말이다. 발레는 정말 너무 매우 진짜 어렵다! 하지만 용기를 주고 싶어 하던 상대도 만만치는 않아 그런 말들이 핑계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자꾸 찾아냈다. 나는 창과 방패의 양보 없는 대화를 들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문득 수세에 몰린 ‘방패’ 쪽이 몸무게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자신의 몸이 무거워서 잘 못하는 것 같다고. 그러자 ‘창’이 말했다.
“월요일 수업엔 임산부도 있으신데요! 몸무게 때문에 발레를 못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실제로 월요일 수강생 중엔 만삭의 임산부가 있었다. 턴도 점프도 아주 잘 소화해서 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창이 덧붙였다.
“지금 근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하다 보면 근력을 붙이면서 당연히 할 수 있어요.
저도 제 몸이 무거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예요. 여기 발레 쉽게 하는 사람 없어요.
다들 자기 몸무게를 들어올려야 해요.”
다들 자기 몸무게를 들어올려야 한다니? 생각해본 적 없지만 꽤 근사한 말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선생님이 한 마디 거들었다.
“저도 제 다리 무거워요.”
방패가 결국 창의 공격에 수긍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선생님의 저 말이 내게 이상한 충격과 안심을 주었는데, 충격은 내가 언젠가 대단히 발전하면 선생님처럼 다리를 가볍게 들 수 있을 줄 알았던 믿음이 깨지면서 온 것이고, 안심은 어차피 모두에게 자기 몸무게는 무겁구나 하는 발견에서 온 것이었다. 그토록 날씬하고, 몸이 곧고, 근력도 짱짱한 발레 선생님도 자기 다리가 무겁다니. 그렇구나? 이럴 수가.
집에 오면서 오늘 들은 대화를 생각했다. 믿음의 와장창과 깨달음의 안심도 좋았지만 그전에 발레가 각자 자기 몸무게를 들어올리는 행위라고 말한 것도 좋았다.
발레는 중력과의 싸움이다. 중력을 거슬러 더 강하고 단단하게, 곧고 꼿꼿하게, 풀업(pull up)을 하고, 밸런스를 잡고, 다리를 들고, 점프를 하며, 턴을 돈다. 그리고 이 모든 중력을 거슬러 내가 들어올려야 하는 건, 내 몸무게다.
그래, 다들 자기 몫의 몸뚱이가 있고 자기 몫의 몸무게가 있는 거겠구나. 나는 생각했다.
지난 2주 내내 거지같은 지원서 빈칸을 채우면서 자존감이 늪으로 빠져들 때, 그래서 정말 하기 싫다고 드러눕고 싶어질 때, 종종 발레학원에서의 그 대화를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몸뚱이가 있고 자기 몫의 몸무게가 있다. 다들 남의 것이 아닌 자기의 몸무게를 들어올리며 살아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누구에게나 남들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자기만의 싫은 몫이 있다. 이건 내 몸뚱이와 같다. 거지같은 지원서도 내가 들어올려야 할 무게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원서 쓰기의 끔찍함도 내년 공연을 위해 조금은 감당할 생각이 들곤 했다. 내 몸뚱이를 들어올리며 산다는 건, 내 몫을 감당하고 책임지며 사는 일이다.
사람들이 다 같은 몸무게를 갖고 있다는 멍청한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발레도 그렇다. 좋은 피지컬을 타고 난 사람,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은 다 따로 있다. 우린 타고난 키와 몸무게, 유연성, 근력까지 모두 다르지 않나.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정말 좋은 피지컬의 현역 발레리나인 나의 선생님에게도 자기 다리는 여전히 무겁다는 사실은 내게 안심감을 준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 몫의 무게가 있다는 점에서. 다들 자기 몫을 감당하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무게를 들기를 내가 종종 괴로워한다고 해서 나만 딱히 유별나고 이상한 건 아니라는 점에서. 다들 자기 다리는 무겁다는 점에서.
우린 각자 자신의 몸무게를 들어올려 춤을 추고, 또 직업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