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 시간으로 기억한다. 담임선생님이 앞으로 나와 쓴 글을 읽게 시키셨다.
부끄럽고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교탁 앞에 서서 글을 읽었다. 이때부터였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소멸되고 지워진다. 가끔은 기억을 붙잡고 물어본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글 쓰는 일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100프로를 소진하며 살아내야 했던 삶 속에는 종갓집 맏며느리의 의무감, 친정에서 막내딸이지만 아들 몫의 책임감과 두 아이를 잘 키워야 할 보이지 않는 부담감이 나를 앞으로만 내달리게 했다.
내 달리던 삶에 “잠깐!” 쉬어 가라는 신호가 걸렸다. 담도암 초기 2015년이었다.
수술을 끝내고 2개월 만에 다시 현실로 들어갔다.
딸이 결혼하고 예쁜 손녀를 선물했다. 30년 사업을 손녀와 보내려고 접었다. 손녀를 돌보면서 행복했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을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흐르며 가슴이 텅 빈 유리병처럼 흔들리듯 어지럽고 허공을 걷는 느낌이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은 잠 못 이루는 시간으로 이어졌고 이내 나를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끌고 같다.
막연하게 뭐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거 같아 가슴 밑에 넣어두었던 글을 쓰면서 앞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학교를 검색하고 ㅇㅇㅇ 문창과에 입학을 결정했다. 7월이었다. 문법, 비문, 문장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없었다.
우리 학과에는 좋은 교수님 들이 너무 많으셨다. '재능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입니다.' 한결같은 교수님들의 조언이었다. '쓰는 걸, 미루지 말고 뭐든 쓰십시오. 좋은 책을 많이 읽고 본인의 리츄얼을 만드세요.'
공부를 하고 글을 쓰면서 행복했다.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러 다녔다. 7년이 흐른 11월 검진 결과 재발이 의심된다는 판정으로 항암 내과로 과를 옮겼다. 재발이면 수술을 할 수가 없어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완치는 보장할 수가 없다고 한다.
"완치가 없는 병은 그럼 죽어야 끝날까요?"
고개를 끄덕이신다. 선생님을 쳐다본다. 병 앞에서 의사 선생님들은 어쭙잖은 희망보다 환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듯하다. 나약한 환자들은 희망을 듣고 싶어 한다. 병원 복도에 서서 방향을 잃어버린다.
'또'! 멈추어 가라는구나, 다시 암이라는 아픔 속으로 혼자 걸어서 들어갔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은 어느 정도일까? 그게 두려웠다. 재발이라는 단어보다 항암치료로 오랜 시간을 버티고 가야 하는 나의 인내심이 두려웠지만 가야 할 길이기에 받아들였다. 두 번씩이나 주어진 암과의 사투 서럽다거나 '왜?'라는 원망은 들지 않았다. 내려놓으니 상처로 깊게 다가오진 않았다.
선생님께서 학교를 휴학하라고 하셨지만 휴학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에겐 어설프지만 글쓰기가 이 시간들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다.
걱정했던 항암 부작용은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제약은 있었지만 많은 지장을 가져오진 않았다. 다만 식구들이 겪는 상처는 보는 게 아프다.
브런치에 도전했다. 입학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탓에 이 즈음 학과 학우들이 브런치에 이름들을 올리고 있어 용기를 냈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상에 쉬운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에세이 브런치를 이끌어 주신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고 그 피드백을 수없이 읽고 정리했다. 많은 퇴고와 문장정리를 하면서 처음 쓴 글들을 과감히 버렸다.
열심히 글을 쓰는 그들 속에 속한 '나'를 만드는 과정이다.
지인들, 친구들은 의아해한다. 무슨 과제에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느라 체력을 소진시키냐고, 난 이런 시간들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순간순간의 외로움과 고독함 속에서 글을 마주하면 모든 마음의 요동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가족과 여행하며 테라스에서 생맥주로 건배를 외치며 일상을 이어가길 바라본다.
무언가를 꿈꾸고 간직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아직도 항암 치료는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