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떠나는 오늘이다.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3주 남짓 있으면서 오롯이 독립 서점은커녕 교보문고 한 번 여유롭게 찬찬히 둘러보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게 억울해지면서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떠나기 전 날 마지막 하루는 나갔다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만 돼도 지난 런던 여행처럼 충분히 차오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이번 방문 내내 예상보다 향수병을 심하게 앓은 작은 아이는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런 아이를 떼놓은 채 내가 나갔다 온다는 것은 (혹은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실 수 없는 거 같아 보였다. 그런 엄마에게, 내심 “잘 데리고 있을 테니 하루는 나가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와 ”라는 말을 해 주길 기대했던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속상하고 아쉬웠다.
그래도 어제는 동네 산책길에 눈여겨본 카페에 가서 45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에겐 새콤달콤 캐러멜을 사다 준다고 나왔다가 잠시 샌 거였기에 너무 늦지 않도록 시간을 정확하게 쟀다). 엄마 동네에 이렇게 나의 취향저격 카페가 있었다니 신이 나에게 선물처럼 그곳에 꽂아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신이 났다. 비치된 책들도 내가 읽었거나 눈여겨봤던 책들이었고, 손님들도 이미 그래야 한다는 갈 다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일을 보는 중이었다. 분명 신중하게 골라졌겠지만 무심한 듯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완벽하게 느껴졌다. 혹시 몰라 챙겨 나온 박연준 시인의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다 보니 아쉽던 마음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돌아오는 길 옆집 꽃집에서 본 수박페페를 엄마에게 사다 줄까 망설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사진으로 수박 페페를 보여드리니 엄마는 잎사귀 모양이 정말 수박 같다고 신기해하며 좋아하셔서 다음날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느지막이 일어난 오늘, 지인들 선물도 살 겸 해서 올리브영에 다녀오기로 했다. 다이소에 다녀오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어차피 나도 다이소에 들려야 하니 먼저 혼자 올리브영에 다녀오고 난 뒤 다이소에 함께 가자고 했다. 엄마에게 말씀드린 뒤 집을 나서며, ‘가는 길에 수박 페페도 사고 어제 그 카페에 들러 커피도 한 잔 테이크 아웃 해야지’라는 생각에 조금 들떴다. 아쉽게도 꽃집은 갑자기 휴무였다. 어제 살 걸 이란 후회가 밀려왔다. 카페엔 그 시간 사람이 하나도 없어 마냥 머물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커피를 받아 들고 올리브영에 갔다. 여기저기서 편의점 못지않게 자주 보이던 올리브영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진 못 했던 터라 상상했던 것과는 가격도 물품들도 꽤 달라서 고르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도 혼자 나왔겠다 여유를 부리며 이게 뭐라고 마치 백화점 쇼핑하듯 이것저것 꼼꼼히 살피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올리브영에서 나올 때 문자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다이소로 나오시겠다며 더운데 뭐 하러 왔다 갔다 집에 들르냐고 하셨다. 나를 배려하시는 마음인 줄 알면서도 재촉당한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계산하는 중 다시 문자가 왔다. 엄마는 아이들과 다이소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아직 떠나려면 5시간이 남았고 아무런 일정도 없는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올리브영에서조차 쫓기듯 쇼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다이소에서 먼저 와 있던 아이들은 나보다 쇼핑을 일찍 마치고는 인제 빨리 가자며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밸이 꼬여있던 나는 결국 엄마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러게, 이래서 내가 나 먼저 일단 필요한 거 다 사고 애들이랑 다시 오겠다고 한 건데!” 엄마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러냐며, 그럼 아이들을 먼저 데리고 가시겠다고 했다. 결국 엄마의 말갛게 놀라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좀 더 참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머쓱해져 다 샀다며 돌아 나오는 길, 어제 무턱대고 사지 못한 수박페페가 너무 아쉬웠다. 돌아오자마자 점심을 준비하시는 엄마의 등을 보며 끼니때가 다 돼 가는데 돌아오지 않는 딸, 할 일 하나라도 줄여주자 라는 마음이셨을까, 이해되는 마음은 왜 항상 한 발짝 느리게 오는 걸까 생각했다.
짐까지 미리 트렁크에 실어놓은 뒤에도 남은 시간 지루해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까무룩 낮잠이 들었다. 잠결에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묵찌빠 하는 소리와 까르륵까르륵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번엔 제 때에 이해했다. 내가 편히 자라고 애들을 방에서 데리고 나가 함께 놀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공항에서 아쉽게 아쉽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길, 다음 주면 몰아칠 출근과 바쁜 일상을 앞두고 다행히 마음이 저 밑까지 가라앉진 않는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순간들이 현저히 많아서였을까. 있는 동안 차곡차곡 쌓인 엄마의 마음 덕인지 여름의 끝을 향해 서 있는 이 길목에서 이만하면 충분하지 싶다. 우리가 떠나고 엄마의 마음도 너무 텅 비지 않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