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잠시 쉬러 돌아왔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난 이런 순간을 은근히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이’ 쉬어 갈 수밖에 없는 시간이기에 마음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 이미 생각했던 일정은 마쳤고 남은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려니 조금 아까웠던 터라 노을이라도 보러 나가자고 하던 참이었는데 후두 두두둑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한 거다. 비가 원망스럽다기 보단 나가 있는 동안 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조금은 피곤했나 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북스토어를 가보고 싶긴 했는데. 내일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기기 전에 갈 수 있을까. 도서관도 가보고 싶었는데.
어제저녁 먹으러 나갔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 맛있는 도넛 가게가 있으니 꼭꼭 꼭 먹어봐야 한다며 친구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다른 사람들 말을 엿듣고 있었나. 안 그래도 블로그에서 읽었던 곳이라 가볼까 했던 참이라 오늘 들렸다. riced potatoes를 쓰는 것이 색다른 맛의 비밀이라고 했다. 한 입 베어 물곤 언니를 쳐다봤다. 언니도 한 입 베어 물고 나를 쳐다봤다. 뭔가 진지하게 음미해 보는 표정이었다.
어때?
음… 잘 모르겠어.
풉, 사실 나도.
그래도 많이 안 달아서 좋다.
부디 그 친구는 우리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었길.
등대도 보았고 바다도 보았다. 랍스터 롤도 먹었고 젤라토도 사 먹었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파도 소리도 듣고, 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들었다. 바다와 나무들이 공존하는 이곳을 참 좋아한다. 분명 집과 더 가까운 곳에도 있을지 모르는 장소이지만, 이 년 전 처음 왔을 때 언니와 아이들과 함께 무작정 떠나왔다 만난 곳이었기에 더 특별하다. 이미 유명한 곳이지만 나에게 비로소 ‘발견’된 듯한 각별한 느낌. 두 번째로 온 지금은 또 와서 설레는 마음과 처음처럼 좋지 않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공존한다. 결국 그 두려운 마음이란 것은 이미 좋아져 버린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 드는 마음이기에 난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계속 좋아할 것이란 걸 안다.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일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비밀스러운 맛을 지닌 도넛이라던가, 가격 대비 너무 훌륭한 퀄리티의 탱글탱글한 랍스터 롤, 혹은 어딘가에서도 볼 수 없던 황홀한 광경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함께’ 떠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금 너무 좋다’ 말고는 다른 생각이 안 드는 순간이 몇 번만 있어도 이미 그곳은 충분히 특별한 곳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