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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Apr 21. 2022

우린 계속 인사만 했다

잘 지내지 못하면 어쩌려구 

골드스미스 대학교는 런던의 동부지역인 뉴크로스에 있었다. 테이트 모던 뮤지엄에서 버스 타고 한 시간, 그리니치 천문대는 걸어서 삼십 분. 구글에 소개된 것처럼 아늑한 카페와 팔라펠, 졸로프 라이스, 저크 치킨 등을 판매하는 식당이 즐비했고 유난히 펍(pub)이 많았다. 몇몇 학생들은 낯익은 홈리스에게 담배를 말아줬고, 타과 학생조차 하루에 몇 번씩 마주칠 정도로 작은 동네였다. 아기자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단지 작았다. 고등학교 같은 대학이었지만 근방에서 유일하게 모던했던 순수미술과 건물 꼭대기엔 먹다만 스파게티 같은 설치물이 있었다. 덕분에 학교는 덜 모던해 보였다.

 



새로 산 핫핑크 니트 원피스에 형광 노랑 양말을 신고 1학년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대학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심장이 왜 그렇게 뛰었는지 모르겠으나, 불특정 다수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역력한 옷차림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근육질인 친구가 옆에 앉았다. 머지않아 디자인과의 인싸가 될 제트. 제트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다. 하이 링링. 하고 빙그레 웃으면 덩달아 화답하며 멋쩍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불리는건 좋았다.


 주는 가벼운 기술 수업이었다. 과에 비치된 온갖 기계들을 만져볼  있었으나 번거로웠다. 철이나 나무는 다루기 힘들었고 나무의 특성상 번복할  없다는 점이 적성에  맞았다. 나무는 갈리면 갈리는 대로 끝났고, 철은 다루기 힘들었으며, 매일같이 후줄근한 옷을 입어야 했다.  입는 재미에 살다가 꿈에도 없는 목공을 하려니 답답했다. 기술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집중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조였던 친구들 10명가량을 2주 동안 매일 봤다. 제트도 같은 조였다. 우린 꼬박꼬박 인사를 나눴고 몇 주 후에는 습관처럼 인사했다. 처음에는 기꺼웠던 인사가 갈수록 겉치레 같았다. 호의 같은 인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인사를 안 하기도 뭐했다.

하이 링링.

하이 제트.

하우 알 유?

굳굳.

그리고 제트는 지나갔다. 딱히 오가는 대화 없이 우린 계속 인사만 나눴다. 어쩌다 대화를 해도 반 이상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는 악센트가 강하고 말이 빨랐다. 제트는 나와 가볍게 인사한 후 친구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빠르고 강하게 말을 쏟아냈다. 하루는 웬일로 그가 목걸이를 보며 종교와 관련이 있냐고 물었다. 엄마가 줬다고 말하자 그렇게 대화가 끝났던 것 같다. 검은색 반클리프였다. 그게 우리 사이에 가장 길었던 대화다.


How are you?

직역하면 "너 어때?" 대체로 대답이 필요 없는 의문문. 충실히 답하려는 마음이 더러 무색해지고, 관계 맺기를 포기하고 나서야 형식적인 인사의 효용을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눈 날에는 적응했다고 착각하며 기뻐했다. 껍데기 같은 질문에 적당히 답하고, 오고 가는 스몰토크(small talk)를 즐기고. 예의상 작업이 잘 되냐고 묻고 얼떨결에 웃었다. 집에 오면 볼 안쪽이 얼얼했다. 얼굴만 아는 사람들은 실루엣만 보고 피했으니 이 정도면 개과천선한 셈이었다. 물론 피하기도 많이 피했다. 그중에는 호세도 있었다.
 

호세는 소위 말해 믹스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영국 애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를 믹스라고 칭했다. 흑인과 백인 혼혈이었다. 호세는 어느 날 계단에서 인사하곤 나를 불러 세워 물었다.

"링링. 한국어로 hello가 뭐야?"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 그에게 "안녕."을 알려줬고, 그는 씩 웃으며 "안녕!" 하고는 갔다. 그날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 후에도 호세랑 인사했지만 그게 다였다.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망상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매번 서운하긴 했다. 그는 가끔 한국어로 인사했고, 갈수록 인사가 뜸해지다가, 결국 미묘하게 어색한 사이가 됐다. 그는 혼자 있을 땐 인사했고, 친구들이랑 있을 땐 인사하지 않았다.


호의는 마냥 기쁘지 않았다. 선한 의도조차 상대방에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걸 몸소 겪고 나서야 알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때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제트와는 계속 인사만 했다. 어쩔 때는 그마저도 어려웠지만. 영국에서는 줄곧 어긋난 채로 살았다. 골반부터 서서히 어긋나 척추까지 비틀린 상태로 사람들을 만났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보다 피곤함이 앞섰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생각해보니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친한 적은 없었다. 욕심이 과했나보다.


2018년 가을 런던

(2018년_가을_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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