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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Jul 20. 2022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과 그 종말

Sugar Sphinx, Salvador Dali, 1933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지만 한 번도 글로 써본 적은 없다. 그럴 용기가 없었고, 쓸데없이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짓을 반복하고 있기에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든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의 에로틱한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3년 전 도쿄로 돌아간다. 정확히는 유우의 방이다.


우린 합정의 테크노 클럽에서 만났다. 첫 남자 친구에게 문자로 차인 뒤 집에 있기 싫어서 나온 날이었다. 빠른 비트에 맞춰 미친 듯이 뛰던 내 곁의 아담한 남자가 마찬가지로 격렬했다. ‘하이큐에 나오는 히나타 같아.' 까까머리와 어울리는 몸집을 힐끗 거리며 생각했다.


그가 불현듯 라이터를 빌렸고, 불이 잘 안 붙자 멋쩍게 웃었다. 하얀 얼굴이 사방으로 일그러져 아이 같았는데, 설핏 본 얼굴이 너무했다. 좀 많이 귀여웠다. 곧이어 나란히 소파에 파묻혔고,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유우라고 해.

일본인이었다. 드럼을 친다 했고, 술을 사준 뒤 내게 키스하며 자기랑 같이 나가자고 말했다. 스물둘의 나에겐 상상 이상으로 농밀했던 키스였다. 키스가 좋다는 게 과연 이런 건가 싶었는데 얼굴이 좋은 건지 스킬이 좋은 건지 분간이 안 갔지만 일절 중요하지 않았다. 안될 게 없었다. 하루아침에 문자 한 통으로 날아가는 진심 따위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유우는 술에 취해 내게 사귀자고 했고, 우린 같이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오후엔 홀린 듯이 걔가 드럼 치는 걸 봤다. 그리고는 날 일본으로 초대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지만 그는 귀여웠고, 키스를 잘했고, 예나 지금이나 난 일본을 좋아한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신 차려보니 도쿄였다.

만나자마자 우린 파파고를 사이에 두고 온몸을 써가며 쉴 새 없이 대화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화를 해 본 것 같았는데, 그의 말이 전부 들리고 나의 말이 전부 들렸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한국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보여줬는데, 그 말이 전부 와닿아서 일일이 기억하고 싶었다.

「당신과 더 깊은 얘기가 하고 싶어요.」

아무런 방해 없이 꿈만큼 솔직했던 순간들이 이어졌다.

한글을 배우고 싶다 해서 손으로 검정치마의 노래에 나오는 ‘모’라는 단어를 알려줬다.

* 내가 모자라는 만큼/ 너는 조금 모나 있거든 ‘Love Is All’

일어로는 인연(縁)이라는 말이 한 글자여서 좋았다.


마지막 날 밤, 뭉근한 음악을 깔아놓고 나란히 누워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유우는 나를 달래며 서툰 영어로 ‘코이(恋)’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그냥 두 손을 써가며 일어로 말했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앞을 보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헤어질 수도 있지만 난 사랑이 이런 거라 생각해. 하면서 날 다독였다. 그렇게 이해했다. 사실은 사랑이 좀 더 구체적이고 만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듣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난 스물 두해 동안 가슴에 구멍 난 애처럼 살았다. 툭하면 울었고, 자의식이 강했으며, 스무 살에 혼자 떠난 유학생활에 상황은 악화됐다. 언젠가부터 사는 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별로 살고 싶지도 않았는데 죽을 이유도 없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하염없이 울었고, 집에서는 먹은 것을 토했고,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다가 친구들을 만났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기 만을 바랐다. 소설이나 영화 따위 없이도 잘 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시시하지도 않았고 거창하지도 않았지만 난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했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그리는 사랑은 참으로 거대했다. 그 누구도 내가 원하는 만큼 날 사랑해준 적이 없었다.


일어나 유우가 말아준 계란말이를 먹는데 가슴이 아려왔다. 처음으로 ‘충만하다’는 단어의 뜻을 알았다. 함께 있으면 그만이었다. 삶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지금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도쿄에서 계속 자기와 함께 있지 않겠냐고 물었다. 듣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말이었다.


조만간 한국에 오겠다는 말을 듣고 그와 헤어졌다. 기차에서도 계속 눈물이 났다. 혼자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건 조금 무서운 일이다. 혼자 있기 싫어지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미래에는 마치 평생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유우가 있다. 남은 학기를 빨리 끝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어엿한 직장을 구해 일본에서 유우랑 함께 있고 싶었다. 그전에 걔가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날아와줬으면 했다.


낭만(浪漫)은 ‘물결 랑’에 ‘흩어질 만’이다. 그래서일까, 낭만은 지속적으로 흩어진다. 10일 동안 유우랑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별통보도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대로라면 사시미를 먹을 때마다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마다 걔를 떠올리며 자책할 것이었다. 나 자신을 못 믿게 될 것 같았다. 노래를 들으면 드럼 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래서 무작정 도쿄로 갔다. 상대가 기겁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집에 찾아가 이 애매한 관계를 정리하고, 깔끔하게 다음날 돌아올 계획이었다.


빈 집 우편함에 책 뒷장을 찢어 쪽지를 끼워 놓고 왔다. 유우랑 먹었던 아침을 혼자 먹고 같이 걷던 거리를 혼자 걸었다. 밤까지 연락이 안 되면 돌아갈 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늦은 밤 삐끼들이 즐비한 시부야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유우였다.

「링링, 네가 너무 좋지만 우리가 연인으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 하지만 친구로 남고 싶어.」

있잖아, 사실 나 도쿄야.라고 했더니 내일 보자고 했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다음날 자정이 되어서야 그를 만났다. 정말이지 얘를 오래 보고 싶었다. 몇 년이고 몇 년이고 보고 싶었다. 너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에,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말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는 진솔했고, 다시 믿어보기로 했다. 걔는 거듭 나에게 강한 사람이라며 나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는데, 듣고 나서야 여태껏 그 말을 기다려 왔다는 걸 알았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을 먹으며 각자 책을 추천해줬다. 그는 내게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나는 당시 들고 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여줬다. 유우는 나를 꾹 눌러 안고선 곧 다시 보자고 말하고 나갔다. 편지를 쓰겠다고 했는데 왠지 그전까지 연락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오 자히르」를 샀고, 며칠 뒤 영국으로 돌아갔다.


집을 구하고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간간히 디엠이 왔다. 나는 넘치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먼저 손 편지를 부쳤고, 어느 날 그에게 이메일이 왔다.


안녕,

유우입니다.

나에 대한 글을 삭제해주세요.

( 내 집 사진 , 내 글, )

당신은 스토커에 의해 감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빨리!


그리고는 스토커가 사실은 자신의 오랜 여자 친구 ‘린’이며 여태까지 줄곧 거짓말을 해왔다고 고백했다.

「우리 사이의 흥미로운 대화에 대해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과 한국의 문제는 너무 복잡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문제가 너무 중요합니다. 당신이 우리 집에 온 것이 나에게는 나빴습니다. 나는 그것을 내 여자 친구에게 숨긴다.」


린의 인스타그램 링크도 첨부되어 있었다.


연달아 린에게 이메일이 왔다.


자신도 모든 정황을 방금 알았지만 그는 폭력적이며 바람을 핀 전적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염없이 울었다. 울다가 글을 쓰고 가까스로 작업을 하다가 휴학계를 내고 몇 달 뒤에 귀국했다. 분명히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온몸과 마음을 다 써버린 것 같았다. 다시는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유우와 있으면 내가 유우가 된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고 말과 행동에 확신이 넘쳤다. 그리고 난 줄곧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듣기에 너무 좋았지, 보기에 너무 좋았지, 내겐 과분한 사람이었지. 그런 일을 겪고도 그를 완전히 원망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나는 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보다 믿었던 사람에게 완벽하게 속았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걔한텐 단지 흥미로웠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기도 했다.


난 아직도 종종 린의 sns를 본다. 그녀는 활발히 트윗을 올리고, 둘은 동거 중이고, 그런 날엔 어김없이 지는 기분이 든다. 유우가 그립지 않다. 그럼에도 난 왜 이 짓을 반복하고 있을까. 그와 그녀의 일상이 궁금하기 때문인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기 때문인가. 단지 부러운 걸까. 린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마음에 와닿는 글을 쓴다. 만일 친구로 만났다면 분명 그녀를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린의 sns를 보고 싶지 않다. 그녀와 비교하며 나를 싫어하고 싶지도 않다.


환상(幻想)은 ‘허깨비 환’에 ‘생각할 상’이다. 낭만이고 환상이고, 성질 자체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런 낭만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영원하진 않을지언정 이 지구 어딘가엔 분명 나만을 위한 짝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게 일본이라는 점은 더욱 환상적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분명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앞으로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차고, 차일 것이다. 마음이 남아나는 애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현실이라니. 걔는 알랭  보통 같은  읽지도 않을 텐데, 드럼 소리는 아직도 크게 들린다. 가끔 정말로 위안이 되는 곳은 여기에 없는  같다.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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