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생을 금사빠로 살았다.
말을 조리있게 하고, 귀엽고, 내 말을 좀만 잘 들어줘도 눈길이 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깜찍한 옷과, 앳된 얼굴, 귀여운 웃음 만으로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번 좋아한 사람은 또 오래 좋아했다. 제일 답 없다는 금사빠에 늦사식(늦게 사랑이 식는)이었는데, 이러한 기질은 틴더를 깔며 극에 달했다.
팬데믹-휴학 기간동안 나는 활발한 틴더 유저로 활동했지만 더는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스물 다섯이었고, 남자보다는 나에게 집중할 때라는 걸 피부로 느꼈다. 연초의 다짐은 드물게도 무려 6개월 동안 지속됐는데, 타케우치 마리야(J팝 가수)의 「플라스틱 러브」 같은 만남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미세하게 쪼개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매번 여운이 남았다. 다행히도 근 반년동안은 한번도 틴더나 범블 따위에 접속한 적이 없었다.
반면, 오프라인은 사시사철 연중 무휴 오픈이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괜찮은 사람 좀 소개 시켜달라고 넌지시 말했고(난, 언제나, 환영이야.), 애인이 있는 친구에겐 남자친구의 친구들을 보여달라 외치다가 급기야 카페에서 일 한다던 엄마 친구 아들의 소식을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아는 친구들은 내게 소개시켜 줄 만한 애가 없다고 했고, 날 잘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날 너무 몰랐다. 적어도 1년 이상의 역사가 생길 만한 인연을 원했지만, 자연스러운 만남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한 여름엔 사정이 달라졌다.
그날따라 느닷없이 클럽이 땡겨 충동적으로 친구가 일하는 곳에 갔다. 작정을 하고 간 것은 아니었지만, 무작정 혼자 온 내게 친구는 다른 친구를 소개시켜주었고, 그들을 통해 일준을 만났다.
일준은 나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혼자 글을 쓰다가 뒤늦게 음악을 배운 나처럼 그도 글을 쓰다가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 했지만 난 단번에 그의 MBTI를 맞췄다. 나와 같은 유형 이었기 때문인데, 그는 내게 그걸로 자길 판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른 친구들은 나와 일준만 남겨놓고 떠났고, 우리는 클럽을 드나 들며 수다를 떨다가 결국 첫차 시간까지 모기를 쫓으며 대화를 나눴다. 솔직히 듣다가 정신이 반쯤 나갈 뻔 했다. 미치게 피곤했지만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과하게 들떠있었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데엔 시간이 든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수많은 대화와 웃음을 넘어서 일종의 충돌까지 필요한데,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들어야 했다. 문제는 따로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는 것인데, 이성과의 관계는 매번 어처구니 없이 끝났다. 21세기 소통 방식은 익숙했지만 특유의 공허함은 적응되지 않았다.
다음날 일준에게 먼저 연락 했지만 무의미한 카톡은 순식간에 끝났다. 스쳐 지나간 사람조차 플라스틱 같은 여운을 남긴다. 오지 않는 답장에 애가 타도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난 수다떠는 걸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대화는 프랑수와즈 사강(프랑스 작가)의 불륜 소설보다 재미있고, 젠더리스한 넷플릭스 틴에이저 드라마만큼 신선하다. 내게는 그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일로, 어쩌다 만난 사람이 허물 없다고 느껴지면 대책없이 모든 걸 쏟아내고 만다.
한 친구는 내 안의 넘쳐나는 사랑을 쏟을 곳이 필요한 것이라 했지만 이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커녕 에로스도 아니다. 그보다는 권태를 인내하는 능력의 부재와 가까웠다. 사람을 좋아하는 주제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니, 사람을 만날 때마다 촐싹대는 꼬리를 주체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쿨한척 온라인을 활보 하기에는 가히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은 사랑보다는 구원을 열망했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가는 사람은 어딜가나 있었고 정작 날 가장 모르는 인간은 나였다. 골 때리는 일이었다.
철학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고 말했다. 반면 나르시시즘의 대척점에 놓인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하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고로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그리고 난 제발 좀 사라지고 싶었다. 나에게서 나를 덜어내고 싶었다. 나를 그만 괴롭힐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사랑할 태세로 거리를 활보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중엔 내 모습이 어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손쉽게 날 멜랑콜리에서 건져 냈는데, 그저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그만이었다. 상대방의 눈빛부터 말투, 말하는 방식, 호불호, 플레이리스트, 목소리, 머리카락의 길이와 손의 모양, 자세, 타투, 웃을 때 휘어지는 눈, 사소한 습관까지 전부 담으려고 노력했다. 열중할 대상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삶을 제대로 사는 것 같았다. 일일 다큐를 찍으며 덕질을 자처하는 꼴인데, 그럴수록 상대방은 강력하게 남았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열정일 뿐이고, 만남은 주로 회차 당 15분도 채 안되는 유튜브 예능 토크쇼 같았다. 스트리밍 같은 마주침 사이에 반전은 없었다. 단기간에 서로의 가치를 가늠 하느라 바빠 재치와 유머를 겸비한 범우주적 엘리트가 되어야 했는데, 이 모든 노력과 별개로 타이밍이 전부인 것 같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연 하나하나에 연연하게 된 것도 골치 아팠다. 만남 자체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인데, 이를테면 내 앞에 있는 우주에서 유일한 인간이(평행 우주는 차치하고) 하필 오늘 이 시공간에서 마찬가지로 유일한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사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각별 해진 것은 아니다. 부풀어 오르던 마음도 막상 상대방을 대면하면 그의 사소함에 크게 감동하거나 크게 실망하여 극적으로 요동쳤다. 질긴 인연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관계가 고달플 때마다 우주를 떠올리며 달과 지구의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태양계 초기인 45억 년 전, 화성 크기만 한 천체가 초속 15km의 속력으로 지구를 들이받았다. 충돌이 발생한 직후 지구와 충돌 천체의 먼지들이 뒤섞인 채 지구 둘레를 돌다가 달이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렇게 달은 지구의 유일한 위성이 되었고 둘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지구의 위성이 된 달과 태양을 공전하는 수많은 행성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일마저도 당연해진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통했다고 여긴 이와 멀어지는 것은 애써 모은 플레이리스트를 날린 것만큼 슬프고, 슬펐다. 심지어 달마저도 해마다 약 4cm씩 멀어지고 있다. 일준에겐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고 익숙해질리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슬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날에는 그마저도 슬플 것 같다. 혹시라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싶다.
2022년 6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