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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링 Jun 21. 2022

널 만나기 전에도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고

누군가를 의식하고 옷을 고르면 세상에 지는 것이다. 쪽팔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날 입고 싶은 걸 입어야 한다. 고 스무 살에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스물넷의 여름이다.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산책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더웠던 여름밤, 우린 연락한 지 사흘 만에 해방촌에서 만났다. 내 머리는 연한 노랑이었고, 무엇을 입을지 몰라 다소 촌스러운 정공법을 선택했다. 할랑이는 흰 셔츠에 마찬가지로 펑퍼짐한 바지. 평소라면 기피할 모나미 룩엔 이유 있는 긴장이 서려있었다.


K는 패션 업계에 종사했고 앞서 심플한 게 좋다고 말했다. 내 옷 중에 심플한 건 드물었고 머리는 이미 꼴값이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도톰한 흰 티에 얇은 셔츠 같은 바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머리는 눈썹이 보일 정도로 짧아 어린 남자 앤 줄 알았다. 뻥이다. 그냥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처음 만난 모든 남자들을 데려갔던 칵테일 바에 K를 데려갔다. 적당히 어두웠고, 오렌지 환타같은 노래를 틀었으며, 긴 소파에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우린 장장 네 시간 정도를 쉴 새 없이 얘기했다. 그는 친한 친구랑 말하는 것처럼 떠드는 게 오랜만이라 했고 난 K만큼 잘 듣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코로나 덕분에 쫓겨나듯 나온 뒤엔 좀 걸을까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더위에 계속 덥다. 덥지? 응 더워. 덥네. 하다가 결국 K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우리 집에 갈래?”


택시 아저씨가 고향이 일산이라는 그의 말에 꽂혀 신도시와 정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말에 적당히, 하지만 성실하게 답하던 K는 말이 길어지자 한 손으로 내 손을 꾹 눌러 잡았다. 그쯤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던 앞으로는 별 상관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샤워를 했고, 남색 티 하나를 빌렸다. 맥주를 두 캔 따고 TV로 유튜브 뮤직을 틀어 놓은 뒤 정신 차려보니 어리숙하게 밝은 빛이 들어 있었다. K는 장거리 연애와 긴 연애를 반복했던 사람으로 이젠 사람 만나기가 무섭다고 했다. 얼핏 듣기에도 이 사람이 얼마나 애인을 끔찍하게 아끼는지 알 수 있었는데, 나이에 걸맞은 여우라 생각하면서도 홀딱 넘어가버렸다. 말만 듣고도 그의 여자 친구가 되고 싶었다. 드디어 연애 다운 연애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십대라면 누구나 하는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그런 거. 설탕을 잔뜩 쳐 솜사탕을 굽던 찰나에 K가 말했다.

“난 이 사람이다 싶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할 수 있어.”
 탐스러운 핑크색 솜사탕을 한 손에 들고 소나기를 맞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 시원하긴 했다.


다음날 그에게 잘 들어갔냐고 카톡이 왔고, 우린 매일같이 연락만 했다. 나도 모르게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K는 술에 취해 쓴소리를 하다가 눈시울이 붉어졌고, 검정치마를 좋아했으며, 가슴팍엔 파란 별이 있었다. 그와 결혼하면 내가 마흔 일 때 마흔아홉일 테고, 책임감이 강해 쉽게 가정을 저버릴 것 같지도 않았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고 겉보기엔 까칠해도 (아마) 자기 사람한텐 다정할 것이었다. 그리고 웃을 때 귀여웠다. 결혼은 모르겠고 연애는 당연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속으로 셈을  , K  나게  판단하며 계속 착하다고 덧붙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머리 위에 띠지가 붙었다. 내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보는  같았다. 귀여운 사람이 좋다고 했지만 그놈의 귀여움은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당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감도  잡혔다. 어떤 척을 해도 빤할 것이었다. 그럴 바엔 마음껏 나를 보여주는  낫지 않나. 뭔가 그러고 싶었다. 왠지 그래도   같았다.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옷장 한켠엔 하와이에나 어울릴 법한 꽃무늬 원피스가 득실거렸다.



인간들은 꽃을 깊이 사랑한 나머지 몸과 가까이 두기로 결정한 것 같다. 꽃을 사랑한 세월만큼 꽃무늬엔 장구한 역사가 깃들어 있다. 동서양에서 꽃과 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지상과 천국을 연결하는 사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를 저승의 통치자 오시리스를 섬기는 매개로 사용했고, 그리스에서는 아네모네 꽃을 숭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꽃무늬는 아름다움의 표현인 동시에 상징성이 강한 장치였다. 그리고 내겐 일종의 고백이었다.


옷장 속 꽃무늬 원피스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부끄러운 것과 부끄럽지 않은 것. 편의상 이 둘을 샤랄라와 뾰로롱으로 칭하겠다. 샤랄라는 아무리 과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의 패턴으로 소개팅에나 입고 갈만한 소소한 얼룩이다. 샤랄라는 몇 벌 되지 않는다. 반면에 뾰로롱은 매해 최소 서너 벌씩 구입하지만 한철이 지나면 언젠가 이런 걸 샀다는 게 쑥스러워질 정도로 뭔가 유치하고 매우 촌스럽다. 그럼에도 난 찜통 같은 더위를 기다릴 정도로 뾰로롱을 좋아한다.


여름 잠옷으로 알맞은 남대문 시장의 할머니 원피스는 물론이거니와 다소 과한 외출용 빈티지 뾰로롱까지. 무늬와 색상은 당돌한 보라부터 민트 레이스 시스루까지 베스킨라빈스다. 무더운 여름, 뾰로롱 한벌만 걸치고 콜드 브루를 테이크 아웃하는 것은 극강의 기쁨이나 뾰로롱은 오랜 친구를 만날 때나 홀로 외출 시에 선택한다. 첫 만남에 뾰의 자리는 없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르다.


뾰로롱을 입는다는 건 나를 있는 그대로 봐달라 외치는 짓이다. 나 사실 이런 사람이야 하고 밝히는 짓이다. 정갈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영혼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샤랄라를 걸치고 머리에 작은 꽃핀을 여러 개 달기로 합의를 봤다. 약간 미친년인 줄 알았다.


K와의 두 번째 만남은 합정의 이자카야에서 성사되었다. 다치에 나란히 앉아 화요를 걸치니 걸쭉했던 몇 주가 꼴딱꼴딱 넘어갔다. 꾸준한 연락 사이 명백한 신경전이 있었고, K가 약속을 한번 미뤘다. 조만간 그대로 쫑날 삘이었으나 K는 날 만나러 왔다. 사실 내가 빌려 간 남색 티를 받으러 마지못해 왔다고 생각했다. 우린 이주 전에 같은 침대를 썼고 난 K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대로 날 만지게 두었다. 그래서일까. K는 그날 집에서 막 나온 사람 같았다.


화요에 취해 집에 가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분위기는 좋았다. 오뎅 나베도 맛있었다. 연락을 한다고 했고 크게 틀어진 건 없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서 아니 사랑에 빠져버린 건가 싶었다. 지금 와서 보니 어긋나버린 걸 몸이 먼저 눈치 깐 것 같다. 다음날 연락이 왔고, 세 번 씹혔고, 베라 기프티콘까지 보냈지만 그 후로 다시는 K를 보지 못했다.


난 아직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다만 그날의 꽃무늬만큼 내 감정이 앞섰던 것만 기억한다. 묻고 싶었던 것도, 듣고 싶었던 말도, 들어야 했던 말도 많았는데 서운함만 넘실거렸다. 무늬는 가짜. 꽃무늬는 무늬만 꽃인 얼룩이다. 그래도 속절없이 꽃무늬 원피스를 꺼낸다. 초록에 당돌한 보라. 민트 레이스 시스루. 별 수 없는 여름이다.


2022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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