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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is Ku Feb 21. 2024

나의 엑스는 야수 같은 인디언

불륜할 수 없다면 외국인 남자친구와 살아본 이야기라도 써볼 테야!

브런치 글을 한참 읽을 때 상위권에서 계속 노출되는 글이 배우자의 바람 혹은 불륜으로 파탄난 결혼 이후에

생활 그 기록을 다룬 글을 많이 접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저로서는 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아보고자 호기심에 몇 번 클릭을 했지만 왜 그런 글만 노출이 되는 거지? 글이 잘 읽혀서 그런 건가? 아님 그저 자극적인 소재라서 그런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본인이 불륜이나 이혼의 대상자가 아니라면 나의 해외에서의 동거 경험이라도 써보겠다는 야심 찬 기획으로 올 글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미국 로스앤젤레스입니다. 때는 2009년 벌써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그리 오래된 기억

같지 않습니다. 저는 당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여행을 갔습니다. 아파서 수술을 하고 후유증으로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었는데. 아프니까 쉬면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떠오른 게 미국여행이었습니다.

유럽은 그때도 벌써 두 번 갔으니까. 마침 무비자로 90일간 미국을 갈 수 있어서 몸이 조금 괜찮아진 상태가

되면서 바로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친구가 있는 LA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을까요?

그냥 LA를 첨 가서 너무도 몰랐던 지라 그냥 수영장 있는 싼 호텔을 구했는데 그와 그곳에서 마주친 거죠.







수영장인지 호텔 어느 구석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거의 처음부터 호감을 가진 상태로 대화를 이어가고 그의 차로 드라이브를 한 두 번쯤 갔을까요? 그러고 저는 바로 렌터카를 해서 라스베이거스, 후버댐, 그랜드캐년, 샌디에이고 등을 갔기에 못 보고 또 바로 이어서 뉴욕 한달살기를 갔기에 정말 한 두 번 정도 보고는 내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이 보지 않은 채로 연락이 이어졌고 저는 다시는 LA에 갈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내내 설득했습니다. " 네가 오면 좋겠다.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갈 상황이 아니니 와주면 아주 아주  잘해주겠다." 이러면서요.

적극적인 그에게 말려서(?) 저는 결국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출국하면 되는데 굳이 그를 만나러 LA로 가서

일주일 정도를 보내고 왔습니다. 물론 LA를 충분히 보지 못해서 다시 가고 싶기도 했으니까요.







못 본 사이에 그는 호텔에서 봤던 그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뭔가 한편으로 불쌍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거의 파산 상태라면서 마트에서 냄비 세트를 사주면 맛있는 파스타를 해주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저는 그에게 냄비를 사줬고, 그는 나에게 파스타를 비롯한 음식들을 해줬습니다. 식당에서 일할 정도로 그의 요리는 맛있었고 우리는 그야말로 식궁합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LA에서의 일주일. 저는 가보고 싶었던 곳을 그에게 말해서 다녔습니다. 게티미술관이나 헐리우드 거리 등 밤의 도시를 느낄 수 있는 그곳을 그와 다녔고, 그는 저에게 한국에 가지 말고 같이 있자고 살자고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늘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아주 진부한 대사로 " 너는 나의 사랑이고, 나의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면 좋겠고, 같이 평생 살아가자고.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지어주겠다"라고 말입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간지러운 대사는 영어로는 다르게 들리는 겁니다.


" You are my Love of my Life. Will you be Mother of our child? I will build for you beautiful House on Hill.Let's live together here, forever!"


저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에게 듣는 이 진부한 대사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대사에 혹 하고 넘어갈 정도로 허술하지도 않고 그에게 충분히 빠지지도 않아서 그냥 알겠다고 하고 일단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달래고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헤어질 때 그가 보이던 눈물을 기억합니다.

나와 헤어져서 슬퍼서 우는 건지? 아니면 파산의 슬픔인 건지?


뭐가 뭔지 모를 감정과 여운을 뒤로한 채 90여 일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그 뒤로도 영상 통화도 하고

한참을 연락하면서 지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을까요? 정말 뜬금없이 연락이 온 그가 한국으로 오겠다고 합니다.

"왜? 하고 냉담하게 물으니 "너의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너를 데려오겠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뭐"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그의 당돌하고 실없어 보이는 말속에서 어쩌면 진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믿고 연락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곤 그가 오는 거보다 내가 가는 게 빠를 듯하여 그에게 항공권을 보내라고 했더니 그는 정말 편도 항공권을 보냈습니다. ( 눌러 앉히려는 작정으로 말이지요. )








그가 보낸 티켓은 부산 - 베이징 - 시애틀을 경유해서 그가 거주하던 캐나나 에드먼턴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으로 미국 경유 편인데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공항에 갔고, 비행기는 마침 연착되어서 베이징에 이틀이나 머물러야 했고, 결국 경유지인 시애틀이 아니라 시카고를 거쳐서야 미국에 갈 수 있었고, 편도 항공권만 가지고 있던 저는 immgration에 잡혀서 리턴항공권을 바로 구매해야 했습니다. 당장 구매하지 않으면 집으로 바로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들으면서요.

저는 맞서 싸우려고도 해 봤지만 그들의 요구에 그저 대략 3개월 뒤의 항공권을 사고 시카고에서 시애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 동거 이야기 보다 프롤로그 식으로 쓰게 된 동거 전 만남부터 캐나다에 가게 된 사연을 쓴 듯한 느낌이지만 미국여행을 처음 가서 좋아하게 된 이가 그였고 헤어진 지 한참이고 우리는 더 이상 페이스북 친구도

아니지만 아직도 가끔 연락 와서 나를 생각한다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여하튼 너무 길어지는 듯 하니 다음 편에 이어서 캐나다생활 이야기를 더 올려보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치앙마이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당분간은 집에 귀국할 예정 없이 현재진행형으로 여행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가요?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하세요.

어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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