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존 왓츠 (2021) 리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감독: 존 왓츠
제작: 케빈 파이기
출연: 톰 홀랜드, 젠다이야, 베네딕트 컴버배치 외
별점: 4/5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세상에 정체가 탄로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각기 다른 차원의 불청객들이 나타난다. ‘닥터 옥토퍼스’를 비롯해 스파이더맨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숙적들의 강력한 공격에 ‘피터 파커’는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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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작성했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단평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21세기 수퍼 히어로 영화 가운데 가장 윤리적인 작품이며, 동시에 가장 '시네마적'인 작품"이라 평했다. 단평에서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그 이유를 자세히 논할 수 없었기에 이번 글에서는 (스콜세지의 말을 빌리자면) 테마파크적 영화의 프레임 속에서도 <노 웨이 홈>이 보여준 시네마적 가능성에 대해 논해보려고 한다. 이 작업에서 가장 의외이며 또 놀라운 대목은 영화가 보여준 시네마적 상황들이 대부분 오락영화로서의 재미를 추구하는 장면들에서 발현된다는 데 있다.
잊히고 싶지 않음의 공포
<노 웨이 홈>의 사건은 자신으로 인해 친구들이 고통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 '소년' 피터 파커의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다. 작중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사처럼 그는 M.I.T 입학처 관계자를 설득해보려는 시도조차 없이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을 지워내는 무리한 마법을 감행하려 한다. 이는 자신이 하려는 일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하는 소년적 치기이며, 두 명의 악인을 심판하고 한 차례의 우주적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은 어린 아이에 불과한 MCU 속 피터 파커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런 그의 면모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요구한 주문의 파급력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잊힘'의 예외를 설정해달라고 닥터에게 부탁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수많은 다른 평행세계에서 스파이더맨을 찾는 빌런들이 스며들어오는 계기가 되고 만다.
유머스럽게 전해지는 이전 시리즈의 후일담
닥터 옥토퍽스를 시작으로 그린 고블린, 일렉트로, 리자드와 샌드맨이라는 이전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들이 차례로 등장하자 닥터 스트레인지는 피터 파커에게 그들을 모조리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생텀 지하 던전으로 잡아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던전에 갇힌 다섯 명의 악당들은 스파이더맨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각자와 대면한다. 이 장면은 매우 유머스럽게 그려지는데 장면 자체가 이전까지 진행되었던 이야기들의 후일담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특히 뒷 시점의 빌런은 이전 시점의 빌런을 알고 있지만 역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깨알같은 현실성이 스파이더맨 시리즈 팬들에게 큰 재미를 준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 끝에서 우리가 반가운 재회로 인해 잊고 있었던, 아니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세계와 시점에서 스파이더맨의 손에 죽은 이들이라는 것.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다정한 이웃'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이들은 모두 스파이더맨에 의해 죽는다. 그런데 그게 뭐? 어차피 악당이잖아?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고블린의 선한 원래 인격을 본 피터 파커는 이들 빌런들 모두가 사실 처음부터 악한 이들이 아닌, 모종의 계기로 악에 지배당하거나 악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그랬다. 이전까지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들은 스파이더맨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부분의 빌런들을 어쩔 수 없이 악이 된 입체적 캐릭터들로 설정해왔다.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죽게 하거나 세상에서 단절시킴으로써 피터 파커가 느끼는 죄책감과 피로함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생각해보자. 선한 기업가였던 노먼 오스본은 자신이 투자한 강화 인간 프로젝트에 스스로 지원했다가 부작용으로 이중인격을 얻어 악당 그린 고블린이 되었다. 건실한 과학자였던 오토 옥타비우스 박사는 핵융합 기술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이식한 인공지능 기계팔에 정신이 지배당해 닥터 옥토퍼스가 되었다. 플린트는 비록 생계를 위해 강도짓을 하던 범죄자였으나 입자가속기에 빠져 샌드맨이 된 후에도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코너스는 장애인 복지에 대한 기여와 한 쪽이 없는 자신의 팔을 재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과학자였으나 실험 부작용으로 괴물 리저드가 되었다. 일평생 누군가에게 주목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던 무능한 엔지니어였던 맥스는 전기뱀장어 수조에 떨어진 사고로 전기 조종 능력을 얻은 후 비뚤어지며 일렉트로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유는 다르나 외부적 요인으로 악당이 된,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하고 모두 그곳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그게 그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정한 이웃'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스파이더맨이 이를 그냥 넘어갈 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다. 복지 재단에서 근무하는 메이 숙모의 영감을 받은 피터는 이들의 선한 본성을 되살려내고, 이들이 죽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와의 갈등도 불사한다. 영화가 드러내고자 한 윤리성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전유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피터는 이들을 치유하고자 스타크의 유산인 연구실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우선 옥타비우스의 인공지능을 제어 가능한 상태로 되돌려놓아 그를 치유한다. 그러나 오스본의 이중인격을 치유할 혈청이 거의 완성된 순간 그의 악한 면모인 '고블린'이 깨어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른 이들을 선동해 탈출해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피터의 마지막 남은 가족인 메이를 살해해버리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메이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라고 할 수 있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를 읊조린다. 사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큰 힘과 큰 책임이라는 같은 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는 기존의 시리즈에서 쓰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재전유되었기 때문이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해당 대사는 갓 힘을 얻은 피터가 자만하고 누군가를 미워함이 앞서 눈앞에 보이는 악행을 막지 않았을 때 그 결과가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노 웨이 홈> 속 이 대사는 선의를 가지고 가진 힘과 능력으로 그것을 실천하려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는 희생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며, 그것을 감수하는 것 역시 힘의 책임일 수 있다는 맥락에서 사용되어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한층 더 폭넓은 이해를 가능케 했다.
연대 속의 성장과 트라우마의 해소
그리고 슬픔과 분노에 빠져있는 MCU 세계의 피터를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 드디어 모두가 기다려왔던 그들이 등장한다. 다른 세계의 빌런들 만큼이나 많고 많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들 말이다. 그들은 힘을 합쳐 다시금 빌런들의 치유를 준비하는데 그 과정에서 여전히 남아있던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는 극복된다. 다른 세계에서 온 두 스파이더맨은 자신들이 죽일 수밖에 없었으나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던 과거를 바꿔냄으로써 비로소 과거와 화해하게 될 것이고, MCU 세계의 스파이더맨은 메이의 죽음이라는 겪어본 적 없는 슬픔과 비슷한 경험을 먼저 수 차례나 겪어온 다른 피터 파커들로부터 그토록 따스하게 위로받는 것이다.
가장 윤리적인 방식으로 못다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다
뒤이어 모두가 기대하던 세 명의 스파이더맨, 닥터 옥토퍼스와 남은 네 빌런들의 전투가 시작된다. 처음에 삐걱이던 세 스파이더맨의 팀워크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한 명씩 빌런들이 치유되면서 이야기는 점차 완성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완성은 단순히 <노 웨이 홈>의 마무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두 스파이더맨이 미처 끝맺지 못한 다섯 편의 영화마저 멋지게 완성해낸다. 오리지널 스파이더맨은 스스로 핵시설과 함께 침수를 결의하여 눈물의 작별을 했던 은사 옥타비우스 박사와 애틋한 재회를 하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마치 그웬을 잃었던 때처럼 추락하던 MJ를 MCU의 피터 대신 구해냄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해소하지 못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으로 이 세계의 스파이더맨은 메이를 살해한 그린 고블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그를 똑같이 살해하려 들지만 나머지 두 스파이더맨이 그것을 막아내고 비로소 복수는 영웅의 방식이 아님을 깨달아 그를 치유해낸다. 모든 시리즈의 끝맺지 못한 갈등을 완벽히 메꾸어내다니, 이토록 윤리적인 마무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되다
그러나 행복한 마무리도 잠시, 스파이더맨들과 비로소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모든 빌런들이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려는 가운데 문제를 일으킨 복원 마법으로 인해 새로운 혼란이 야기된다. 불안정해진 멀티버스의 틈으로 뒤이어 수많은 다른 세계의 인물들이 MCU의 세계로 침공하려는 것이다. 이젠 방법이 없는 건가 싶은 찰나, 영화는 이 총체적 난국에 대해 수미상관적 아이러니를 선사하며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다. 비로소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와 무게감을 극복해 어른으로 성장한 피터 파커가 자신을 희생해 멀티버스를 닫는 것이다. 모든 다른 우주의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이전의 시리즈에 대한 이토록 아름다운, 영원한 작별이 이뤄진 후 누구로부터도 기억되지 못하는 노매드가 된 피터 파커는 홀로 새 출발을 선언한다. 세 편의 단체 영화와 세 편의 단독 영화를 거친 끝에 그는 비로소 진정한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로써 세 차례나 영화 속에서 언급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대사처럼, 소년이던 피터 파커가 이제야 자신의 힘에 걸맞는 책임을 가진 영웅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노 웨이 홈>은 마무리된다. 말하자면 <노 웨이 홈>은 이전 시리즈들에 대한 존중과 헌사,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포부와 다짐, 그리고 홀로서기와 새출발을 감행한 피터 파커의 성장까지 모든 것을 보여준 히어로 영화 사상 최고의 수작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시리즈 영화의 캐릭터성과 오락성을 극한으로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 '테마파크적'이며, 과거를 계승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시네마적'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끝끝내 증명해내고 말았다. 그들이야말로 모든 이전 히어로 영화들의 적자이며, 또한 그들은 아직 하고픈 말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