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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Feb 19. 2024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열여덟 살 겨울, 잠시 서울에 머물렀다. 익숙지도 않은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다녔다. 여기저기라고 해봤자 길을 잘 모르는 내가 홀로 갈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서점을 자주 갔다. 동네 서점을 좋아한다. 손글씨로 적은 베스트셀러 목록과 서재 곳곳에서 서점 주인의 마음이 담긴  메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큰 서점에서는 이러한 따뜻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자리에 줄 맞춰 놓여 있는 수많은 책. 그리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고 그 가운데서 이 책과 만났다.


종종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서도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책들이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아주 길고 평서문으로 끝나지 않는 특이한 문장에 눈길이 갔다. 노래든 책이든 제목이 길면 어? 하고 시선을 끄는 것 같다. 가령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라던가. 두 번째는 표지에 그려진 계란 귀신 얼굴과 같은 그림에 눈이 갔다. 마지막으로 다 읽은 후에는 이 책을 정말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틈만 나면 이 책을 선물했던 것 같다. 표지 안쪽에 책을 언제 어디서 샀는지 혹은 누구에게 선물 받았는지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누구에게 이 책을 선물했는지도 기록한다. 오랜만에 이 책을 펼쳐 맨 앞면을 보니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맨 처음에 읽었을 때 충격을 준 글은 ‘여행과 생활’이다. 어떻게 저런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여행과 생활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_여행과 생활


여행집을 좋아한다. 낯선 곳의 온기나 매서움을 글로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좋다. 글을 읽는 내내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병률 시인님의 산문집도 몇 번을 곱씹어 읽었다. 이 산문집은 여행집이 아니지만, 참 많은 지역이 나온다. 해외보다는 우리나라 곳곳이 등장한다. 아마 이 산문집을 보고서부터 통영, 여수에 가고 싶다고 노래 불렀던 것 같다.


그제야 나는 꿈속에서 지금이 꿈인 것을 깨닫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당신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힘껏 눈물을 흘리고 깨어났을 때에는 아침 빛이 나의 몸 위로 내리고 있었다. 당신처럼 희고 마른 빛이었다. _희고 마른 빛


하지만 관계가 끝나고 나면 그간 서로 나누었던 마음의 크기와 온도 같은 것을 가늠해 보게 된다. _몸과 병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_마음 한철


‘취향의 탄생’이라는 글에 실린 박준 시인님의 ‘마음 한철’이라는 시의 일부다. 이 대목을 보고 얼마 전 알게 된 이영훈 님의 '일종의 고백'이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2017년 오말초의 원픽이 ‘여행과 생활’이었다면 2021년 오말초의 원픽은 ‘사랑의 시대’다. 아마도 사랑을 배워가는 중이기에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사랑의 시대는 시인님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모티브로 쓴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소설 대목이 곳곳에 인용돼 있었고 나는 상실의 시대를 꼭 보리라 다짐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다. 연애를 처음 시작한 날을 기억하고 백일, 1주년, 천일 등을 기념할 수는 있지만 사랑이 처음 시작된 날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들은 너무나도 다양하며 그래서 모두 틀리기도 모두 맞기도 하다. 다만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언제나 참일 것이다. _ 사랑의 시대


시인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고 한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그칠 수도 없는 울음. 그러면서도 '감정'을 불안한 층에 빗대어 표현하며 그 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진 애정은 그리 안정적이지 않고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한다. 동의한다. 사랑은 울음과도 같이 감정적이고 어찌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감정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을 '결정'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가벼이 넘기거나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첫사랑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더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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