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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Apr 12. 2024

참을 수 없는 것

재주넘기 여덟 번째 주제: 참을 수 없는 것

가스 불이 켜져 있어 불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강박 사고이고, 이로 인한 불안을 없애기 위해 반복적으로 가스 불을 확인하는 행동이 강박 행동에 해당한다. 강박 행동은 강박 사고나 이로 인한 불안, 괴로움을 예방하거나 감소시키고, 또는 두려운 사건이나 상황의 발생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일시적인 편안함을 제공할 뿐 궁극적으로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 강박 사고나 강박 행동은 환자들로 하여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고,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영역에서 현저한 고통과 기능의 손상을 초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네모난 틀. 엄마가 나를 설명할 때 양손의 검지로 네모를 그렸다. 주현이는 딱, 이래. 자기만의 틀이 확고하다는 뜻이다. 날이 서 있다는 뜻이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뜻이다. 가엾다는 뜻이다. 사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각진 네모. 아마 엄마는 그 모서리와 가장 자주 부딪힌 사람이겠지.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찧고 노려본다. 모서리는 억울하다. 나도 모서리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고. 아프게 할 마음은 없다고. 혹시 켜져 있을 가스 불을 시도 때도 없이 확인하는 사람처럼 어느새 뾰족해졌을 모서리를 한사코 들춘다.


낯선 곳에 가면 꼭 나의 공간을 확보한 뒤 물건을 가지런히 둔다. 일기를 적을 때는 가능한 예쁜 글 씨로 고상한 말을 고른다. 언젠가 누군가 볼 수도 있다. 한 달에 한 번 앨범을 정리한다. 어떤 날은 전화번호 목록을 정리한다. 이 사람과 다시 연락할 일이 있을까? 잠시 고민한다. 나의 인스타 피드를 본다. 어딘가 어긋나 보인다. 수정한다. 블로그에 들어간다. 게시판을 만든다. 없앤다. 만든다. 글을 쓴다. 줄 간격과 양쪽 맞춤과 맞춤법을 확인한다. 어울리는 폰트와 사진을 고른다. 영상을 찍는다. 자르고 이어 붙인다. 게시한다. 삭제한다. 엽기떡볶이를 먹는다. 마라탕을 먹는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 지 않는다.


몇 번의 날들이 지나고 나면 나의 일기장에는 예쁜 글씨가 적혀있다.


*배달 음식 먹지 않기 *운동하기

어제 들었던 설교 말씀과 함께.



넘어진 곳부터 다시 걷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넘어지면 다시 출발선으로 가야잖아. 아니지, 흙이 묻은 바지도 갈아입어야 하니깐 집으로 가야지. 분명 누군가가 넘어지는 걸 봤겠지? 그럼 해가 질 즈음에 다시 나가야겠다.


집부터 출발선까지- 출발선에서 넘어진 곳까지- 뛰어온 사람은 숨이 차서, 그가 쉬는 숨은 몰아쉬는 숨. 고운 모양이 아니라서 언젠가는 분명 폐기될 글자를 쏟아내면서 생각했다. 꼭 몰아 쉬는 숨 같다고. 후, 하, 숨을 내뱉듯 종이 위에 글자를 뱉는다. 그 숨들이 언젠가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고 영영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가스 불이 떠오르는 사람은 날마다 부엌으로 향하고 모서리가 떠오르는 사람은 일기장 앞으로 향한다. 이전에 내뱉은 숨을 확인한다. 아 이 숨은 더 길게. 더 짧게 쉬어야 했는데. 이때에는 ‘곱씹는다’는 표현보다는 ‘되새김질’이 더 어울린다.


되새김질: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는 짓.


게워 낸 기억은 흐물흐물하다. 흐물흐물한 것을 다시금 붙잡아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본다. 그래 난 이런 숨을 쉬고 싶었던 건데. 이젠 잘할 수 있겠지.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일시적인 편안함을 제공할 뿐 궁극적으로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


사람은 불안을 달래기 위해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 이를 철학적인 용어로 ‘존재자들’ (beings)이라 고 한다. 결국 존재자들은 목마름을 더한다. 가스 불 앞에 가지 않으려 가스를 끊어버린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하지만 이내 다른 불을 걱정한다. 끝없이 목마른 사람이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는 말이 필요하다. 타는 목마름으로 쓰는 글도 필요하다. 하지만 언제나 목마름만으로 이야기를 이어나 갈 수는 없다.


일렁이는 버릇이 있는 물은 바다에 이르러야 잔잔해진다.* 일렁이는 버릇을 안고 더 깊은 곳으로 가고 싶다. 바다 깊은 곳에 둥둥 떠 있으면 일렁이는 게 물인지 나인지 알 길이 없다. 깊은 곳에 나아가서, 때로는 목마름이 아닌 차고 넘치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그러려면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바지에 묻은 흙은 한두 번 쓱쓱 털어버리고 아니, 신경도 쓰지 말고. 어차피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다 사라질 테니.


이 이야기의 후속 편 제목을 정했다.

: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이’ 헤엄치는 날들


참을 수 없는 것은 또 다른 참을 수 없는 것을 낳는다.



*잘랄레딘 모하마드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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