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넘기 일곱 번째 주제: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한 번도 쓰지 않은 사람’을 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동안 쓴 사람을 모두 떠올리는 것이다. 아주 가까운 사람부터 아주 먼 사람까지. 여러 이름과 얼굴이 스친다.
누군가를 적는 일은 그 사람과 한 발치 떨어져 유심히 바라보는 일 같다.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을 빙 둘러싼 채 그림을 그리는 미대생들처럼. 너무 가깝거나 멀다면 볼 수 없는 것을 적정 거리에서 또렷하게 보게 된다.
언젠가 읽었던 이슬아 작가의 에세이에는 열한 장이 넘는 지면 위에 그녀의 친구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두 눈이 바깥을 향해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반면, 두 눈이 나만을 향해 있는 요즘. 이와 같은 주제를 맞이한 지금, 목이 턱턱 막히듯 키보드 위에서 손이 턱턱 멈춘다. (물론 내가 제안한 주제다)
‘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For sale: Baby shose. Never worn) 직관적인 단어로만 이루어진 문장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을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 글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그들은 미사여구 없이도 아름다우며 눈물 없이도 구슬프다.
나에겐 할머니가 셋이다. 이게 무슨 복잡한 출생의 비밀인가. 사연 있는 가족 관계인가. 할 수 있겠지만, 아빠의 엄마(할머니 1) 엄마의 엄마(할머니 2), 그리고 바쁜 부모님 대신 어릴 적부터 나를 돌봐주셨던 순남 할머니(할머니 3)까지 총 세분이다.
할머니 1.
자작자작한 된장찌개를 끓여두고 우리를 기다리던 할머니. 자작자작한 찌개를 다 먹고 나면 끓여주던 율무차. 여름이 오면 한 달 동안 할아버지랑 오대산 야영장에서 지내던 할머니. 그때 할머니가 끓여준 삼양라면. 할머니 심부름으로 사 오던 웨하스. (아... 할머니와의 기억에는 왜 먹을 것이 잔뜩 나열되는가) 팔뚝이 유난히 하얗고 보드라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많이 많이 울던 할머니. 예전에는 신유를, 지금은 임영웅을 좋아하는 할머니. 임영웅 콘서트에 다녀와서는 땀 흘리며 공연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는 할머니. 함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갔던 날에 카페라테를 주문한 할머니. 바다를 보며 커피 한잔 하는 지금이 참 행복하다던 할머니. ”꽃은 잎을 볼 수 없고 잎은 꽃을 볼 수 없다더니, 이제 꽃이 지니 잎이 나네“ 하던 할머니.
할머니 2.
나의 세 할머니의 기억 중 가장 흐릿한 엄마의 엄마. 명절에 할머니 1의 집에는 오래 머물렀지만, 할머니 2의 집에는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된장찌개 냄새 대신 나의 아빠에게 “김 서방, 어서 앉아” 하는 살가운 목소리만 옅게 맴돈다. 조금 커서 다시 마주한 할머니는 내가 몇 학년인지 물었다. “몇 학년이니?” “6학년이요” 우리의 대화는 이후로도 똑같이 몇 번씩 반복됐다. “몇 학년이니?“ ”6학년이요“ 방금 했던 말을 자꾸 잊던 할머니. 그 후로는 보지 못한 할머니. 언젠가 방 정리를 하다 할머니와 엄마와 언니, 셋이 함께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봤다. 몰랐던 시간과 잊고 있던 사실. 엄마 옆에 웃고 있는 엄마의 엄마.
할머니 3.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어떤 물은 피보다 진해서, 나는 그 물을 마시고 무럭무럭 자랐다. 키가 170인 할머니는 다리가 길어 걸음이 빠르다. 함께 걸으면 늘 숨이 차다. 운동회날이면 큰 키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할머니를 단숨에 알아본다. 큰 손으로 만든 큰 소고기 주먹밥을 베어 문다. 할머니 등에는 회색 포대기가 늘 감겨있다. 그 포대기 안에 있는 나는 항상 서글피 울고 있다. 내가 가장 많이 기대어 운 사람. 나의 울음을 제일 많이 받아준 사람.
아아 나로 인해 이토록 납작하게 왜곡되는 나의 할머니들. 그저 따뜻한 음식과 살가운 미소와 포근한 등만을 내어주던 할머니들. 아무리 지면을 채워도 적정 거리에서 보기 어려운 할머니들. 미약하고 유약한 나도 나무가 될 수 있다면 그 뿌리에는 할머니들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