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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Mar 15. 2024

마음 울쩍한 날엔

재주넘기 여섯 번째 주제: 마음 울쩍한 날엔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창세기 8장 22절)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시고 노아에게 말씀하셨데.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는 이유로 모든 생물을 없애시지 않겠다고. 다만, 땅이 있는 한 모든 것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땅이 있는 한 모든 것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땅이 있는 한 모든 것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21절과 22절 사이 접속사는 무엇일까. 그치지 않는다는 것. 희극이자 비극 같은 것.

 

그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어.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래. 우는지 웃는지 모르겠는 목소리로 말하길래. 울지도 웃지도 않는 표정으로 밖을 내다봤다. 눈비 날리네. 눈비를 뚫고 걸을 만큼 울적하진 않은가 보다. 고작 눈비에 질 울적함. 우리 그냥 이야기나 하자. 이게 다 눈비 때문이야. 이게 다 거리에 나가지 못해서야.

 

내 방에 오래 이어지는 소리 1.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딸각도 아니라 사각 수준으로 부드럽게 잘만 눌리네. 이걸로 받아 적는 이야기는 어쩜 명료하고 차분한지. 소용돌이와 허무맹랑도 다 그럴싸하게 입력되네. 사각사각.

 

내 방에 오래 이어지는 소리 2. 가습기 소리. 그때는 음악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물 뿜어대는 소리만 필요하네.

 

-14도

 

이게 사람 사는 날씨냐. 핑계도 좋지. 집에만 박혀있을 수 있잖아. 추우니 겨울잠 잔다고. 밥 먹으니 졸린다고. 다시 침대로 파고들어. 그러다 보면 정말 그냥 졸린 것 같아. 자고 일어나면.

 

유산균에 미지근한 물 한 컵 오메가쓰리 비타민 루테인… 얼마 전에는 홍삼도 추가. 매일 물을 갈고 삼일에 한 번은 필터를 씻어야 하는 가습기를 꾸역꾸역 틀고 춥지 않으려 난로도 켜가며. 아. 이만하면 건강하게. 잘 살고픈 가보다. 하며 다시 침대로.

 

이게 다 눈비 때문이야.

 

거실에서 아름아름 들리는 속보. 20년에 거쳐 만들어진 무인 탐사선, 달에 도착. 2시간 만에 작동 중지. 달은 영하 200도. 혹독한 추위. 20년. 2시간. 영하 200도. 20년. 2시간. 200도. 20년. 2시간. 200도. 혹독하다.

 

혹독한 시간 흐르기 전에 이야기를 더 하자.

응 모든 게 마땅하지.

즐거워야 마땅한 여행, 해피엔딩이어야 마땅할 이야기, 건강해야 마땅한 음식.

마땅한 것들 지겹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땅하여지려는 건 내 이야기. 마땅하길 원하니 꾸미지.

 

*작위적: 꾸며서 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

 

눈에 띄지 않게 잘 매만져 볼게요.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눈에 띄지 않게...... 가끔 띄어도 이해해 주세요. 당신이 사랑 없이도 사랑을 쓰듯.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무릇, 더 바라게 되는 거 아닌가요? 이곳에 많은 게 나에겐 없겠죠. 당신의 글에는 무엇이 많나요? 당신에겐 무엇이 없나요? 그래서 나에게 무얼 주나요?

 

일기책에는 나 모르게 쌓인 이야기가 가득. 나 모르게 쌓인 눈처럼. 언제 이렇게 하얘졌나. 언제 이렇게 시커메졌나.

어떤 이야기는 갑자기 시작해. 서막도 없이. 에필로그의 담당은 오로지 나. 시작하진 않았지만 맺어야 하는 이야기. 당신은 그 이야기를 맺느라고 그리 억세 졌구나. 날마다 쓰러지고 새로 태어나느라 억세 졌구나. 모진 집착만이 남았구나.

 

억세 져야 마땅한 삶.

 

키보드 소리. 가습기 소리. 조명. 이야기. 너무 길었다. 이게 다 눈비가 와서

.

.

.

 

 

눈비가 그쳤고 날도 풀렸네. 큰일이다. 이젠 나갈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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