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님의 책장에는 한 작가의 책을 모아 꽂아두는 'ㅇㅇㅇ 존'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의 책장에도 '이슬아 존'이 있다. 벽돌보다 두꺼운 '일간 이슬아'부터 비슷한 느낌의 표지로 덮인 수필집과 인터뷰집, 새로 나온 소설까지. 하나둘 모으다 보니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작가님의 글은 요가하고 싶게 만들고 비건 하고 싶게 만들고 부지런해지고 싶게 만들고 살짝 시크해지고 싶게 만들다가도, 한 없이 따뜻해지고 싶게 만든다. 무엇보다 쓰고 싶게 만든다는 사실이 가장 크다. 내가 글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적고 있는 이유도 다 작가님 때문이다. 읽고 읽다 너무 좋아서 '이스라디오'도 듣고 들었다. 틈만 나면 팟캐스트에 들어가 공기처럼 틀어두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알림이 떴다. 혹시나 도서전에서 작가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사인을 받게 된다면, 이스라디오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것인지 눈물을 글썽이며 묻고 싶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소심한 사람. 늘어선 사인 줄을 뒤로하고 '이슬아 존'에 유일하게 없는 '심신단련'을 구매했다. 복희 님께서 계산해 주셨다. 내가 없는데도 내가 충만한 느낌이었어 복희 님을 보자마자 이 문장이 떠올랐다. 옆에는 슬아 님이 사인을 하고 계셨다.
복희 님과 웅이 님, 작가님까지 책 속에만 살던 인물들을 실제로 보고 돌아온 저녁. 도서전에서 구매한 '심신단련'을 읽는다. 작가님의 글을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고 소리 내어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의 목소리로 들은 경험이 있다. 어제는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글을 들었다. 그는 작가님의 말투며 목소리까지 어느 하나 닮은 게 없이 읽어 내려갔고 그게 재미있었다. 중간중간 등장인물에 따라 목소리에 변화를 주며 읽는 모습까지 완벽했다. 한참 동안 낭독을 듣고 있자니 책의 글이 아닌, 그저 누군가의 근사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화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사랑하는구나. 언젠가 그녀가 글쓰기를 ‘부지런한 사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글이 다 말해주고 있었다. 숙과 양과 희가 나왔고 그들은 한 챕터의 주인공이었다. 한 인물을 주인공 삼아 열 페이지 넘게 글을 쓰려면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할까. 숙과 양과 희를 본 적도 없지만, 단번에 어떤 사람들인지 알만큼 가까이 있었다. 수줍은 희의 느린 말과 경청을 닮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가 배운 훌라춤은 먼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순을 가지고 싶다. 하나 나는 이미 수줍지 않은 인간이다.
이전에는 책을 보다가 울고 웃었다는 문장이 조금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활자인데, 비지엠도 절절한 목소리도 없을 텐데,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다니. 단단히 간과했다. 활자는 活字(살 활 글자 자) 살아있는 글 이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른다는 걸. '심신단련'을 읽으며 살아 있는 글 속에서 생생한 마음을 마주하다 금세 웃고 울어버렸다.
‘흩어지는 자아’라는 제목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SNS와 관련한 내용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숱하게 겪은 딜레마이기도 하고 여전히 고민과 주저를 반복하는 부분이다. 아주 많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 나 또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른 우주의 말초의 마음은 영영 알 수 없는 말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짜 나라는 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한다. 진짜 나는 정의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의 나는 있어도 진짜 나는 없다. 다만 나를 고민케 하는 것은 진실 여부가 아니다. 그 연결이 얼마나 다른 연결을 방해하는지를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며 떠오른 글감은 인스타그램에 접속하자마자 증발했다. 인스타를 잠시 접었던 몇 달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결국 어디에든 쓰고 촬영하고 업로드하는 사람이었다. 옳고 그름보다는 어떤 형태의 기록이 필요했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페달을 밟으며 그녀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문장을 떠올린다.
글쓰기는 체력과 반복의 영역이다. 결국 쓰는 사람만이 작가가 될 것이다. 너는 결국 커서 최대한의 네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