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말초 Mar 11. 2024

창백한 푸른 점

재주넘기 다섯 번째 주제: 창백한 푸른 점

글을 읽기 전에 두 영상을 먼저 보시면 더 풍성해져요.

https://youtu.be/x-KnsdKWNpQ?feature=shared

https://youtu.be/sYtap_dHZnE?feature=shared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의 깊은 밤, 술기운이 도는 밤. 잠자리에 들기 아쉬운 남자는 책 한 권을 펼친다. 옆에 누운 아내에게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준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펼칠 엄두는 나지 않는, 크고 두껍고 검고 무거운 책.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문장이다. 남자와 여자는 잠시 감동한다. 남자는 대뜸 묻는다. “남산타워에서 밑에 바라본 적 있니?”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다. 우리의 ‘아무것도 아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꺼내는 말머리 같은 것이다. “거기서 보면 진짜 집들이 쪼끄매, 비행기 위에서 봐도 그렇잖아”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만, 여자의 눈은 감긴다. 남자는 아쉬운 대로 맺음말을 뱉는다. “근데 그거 알아? 우리 안은 우주야”

 

소길리의 깊은 밤, 두 사람의 길지 않은 대화를 오래오래 기억하는 여자아이가 있다. 아이는 동해의 푸름과 일출보다도 애월의 잔잔함과 물든 노을을 그리워했다. 어떤 날은 이런 일기를 적었다.

 

야자 후 독서실까지, 모든 일정을 마친 후의 시각은 늘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고 있다. 독서실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은 참 많은 기분이 교차한다. 세상 뿌듯하기도 했다가 세상 우울하고 힘들고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엄청나게 커다란 하늘을 보며 나 자신이 너무 조그맣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오죽하면 “이 커다란 우주라는 공간에 나란 작은 존재는 뭘까~”라는 나만의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열아홉에 흥얼거리던 노래는 6년이 흐른 뒤에도 생생하다. 이제는 여자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머쓱한 나이가 된 여자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종종 음악을 만들고 부른다. “이건 내가 예전에 만든 한 소절인데...”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남자에게 들려준다. 어느 날 남자는 한 소절에서 시작한 이야기로 노래 한 곡을 완성했다. 한 소절을 부르기까지의 여자가 겪었을 마음을 헤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커다란 우주라는 공간에 나란 작은 존재는 뭘까

 

무거운 바람 소리만 남은

적막한 길거리 홀로

 

문득 든 생각에

낯선 밤공기에

내쉬는 숨마저도 어색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흘러가기만 했던 내 일상

 

문득 든 생각에 낯선 밤공기에

내딛던 발걸음을 멈췄어

 

이 커다란 우주라는 공간에 나란 작은 존재는 뭘까

이 커다란 우주라는 공간에 나란 작은 존재는 뭘까

 

켜진 티비처럼

나도 시간 맞춰 켜둔 걸까

 

저기 저 신호등처럼

밤마다 사라지는 걸까

 

여자는 남자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열아홉 새벽하늘을 떠올린다. 실로 저런 가사를 지어 부르던 마음은 고독보다는 희망에 가까웠다. 아니 어쩌면 두 마음을 동시에 품고 부르는 노래에 가까웠다. 넓은 하늘 아래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서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아주 작은 존재들이 셀 수 없이 많아서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닿아있지 않지만, 분명 연결되어 있는 다른 존재를 생각하면 안도감이 들었다. 작아서 슬펐고 작아서 기쁜 밤이었다.

 

소길리의 부부와 노래 한 곡을 만든 연인. 이들은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스스로가 지구인임을 실감하기에는, 실감해야 하는 다른 것이 너무 많다. 친구이자 가족이자 동료이자... 많은 역할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모두를 관통하는 한 가지 진리를. 우리는 지구인이다. 어떤 사실은 너무 자명해서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태여 설명하는 자만이 창백한 푸른 점을 깨닫는다.

 

칼세이건이 깨달은 창백한 푸른 점은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극장의 아주 작은 무대’다. 소길리의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은 꼭 작은 무대 같다. 민박집을 찾아오는 많은 손님은 꼭 그 무대에 오르내리는 배우들 같다. 그들에게는 저마다의 시나리오가 있다. 그 시나리오를 직접 택한 사람은 없다. 그저 조금씩 수정할 뿐이다. 연극이 시작된다. 무대 위에는 노부부, 결혼을 앞둔 연인, 엄마를 갑작스레 떠나보낸 세 남매, 귀가 들리지 않는 여자, 새를 관찰하러 온 아들과 아버지...... 다양한 배우가 등장한다. 그 무대에서는 오직 서로가 서로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박수 쳐줄 수 있다.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줄 수 있다.

 

당신과 내가 있는 곳도 작은 무대다. 이곳에서 나도 배우이자 관객이다. 박수받거나 주고, 상처 주거나 받는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자주 빠지게 되는 착각의 늪이 있다. 오로지 나의 시나리오가 맞다는 착각의 늪. 주인공은 나라는 착각의 늪. 그 늪에서 헤어 나오기 싫은 나머지 다른 배우를 야유하거나 외면한다. 그러는 동안 창백한 푸른 점에는 붉은 피의 강이 생겨난다. 나를 겸손케 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붉은 피의 강을 만들 수 있다는 강력함이 나를 수그러지게 한다. 남자의 맺음말이 떠오른다. “근데 그거 알아? 우리 안은 우주야” 부디 우리가 품고 있는 우주가 다정한 모습이길 바라게 된다.

 

1980년 한국이라는 무대에는 대학가요제라는 (진짜) 무대가 있었다. 거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묻는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연극이 끝난 후, 샤프) 음악 소리와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가 멈춘 순간을 보는 사람과 멀어지는 창백한 푸른 점을 보는 사람은 닮았다. 이들이 느끼는 정적과 고독은 공허하다. 동시에 희망차다. 공허함을 느끼는 자만이 빈자리에 무언가를 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 속에서 오직 지구인만이 지구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



이전 22화 이슬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