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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Feb 23. 2024

아무튼 노천탕

몸은 따뜻한 물에 잠겨있고 옆에는 물이 졸졸 흐른다. 살과 물이 닿을 때 찰박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히노키 탕의 나무는 미끄럽다. 눈앞에는 나뭇잎이 서로 스치고 진달래에는 벌이 붙어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바깥공기를 마시고 있으니 무언가 낯설고 자유롭다. 열이 오르면 잠시 나와 발만 담근다. 주위를 보니 사람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벤치에서 해를 받고 있다. 대화도 핸드폰도 할 수 없는, 온전한 혼자의 상태에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다가 자꾸만 드는 생각을 적고 싶다가. 방수 노트와 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장은 그럴 수 없으니 우선 더 생각하고 기억을 해보기로 한다. 그 기억은 이곳에 옮겨지는 중이다. 목을 여러 번 돌린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요가에서 배운 호흡을 해본다.

탕 안으로 중년 여성 한 분과 노년 여성 세 분이 들어온다. 이야기가 들린다. 마침 생각이 멈춰있으니 누군가의 이야기가 반갑다. 할머니 한 분께서 오랜만에 온천에 오니 영감 생각이 난다고. 영감이 살아 계실 때는 온천에 자주 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할머니를 잠시 떠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한 할머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것 같다. 중년 여성분께서 그분을 모시고 나간다. 아직 탕에 계신 두 분께서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가신 분의 성함을 부르며 00이 얼굴이 안 좋다. 하신다. 그러고는 두 분도 나가셨다. 다음으로 들어온 중년 여성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는 어디를 가려면 파스를 챙긴다는 게 정말 웃기는 일이라고. 나이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이 든다는 것을 짧게 곱씹어본다.

언젠가 유퀴즈에 나오신 김혜자 배우님께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관해 뭔가.. 뭔가 슬퍼요. 아주 구체적인 슬픔은 아니에요. 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새벽에 일어나 창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 밀려온다고. 박완서 작가님도 비슷한 글을 남기셨다. 아주 맛있는 걸 먹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고. 늙어가는 것은 그런 것일까. 막연한 슬픔 가운데 고요히 잠기는 눈빛을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앉아 햇빛을 받던 벤치에 누워본다. 반은 노천탕 위 나무 지붕이 보이고 반은 하늘이 보인다. 더운 나라에 와서 수영을 하다가 썬 베드에 잠시 누워 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이 너무 많이 보이는 비키니를 입고. 크크.. 챙겨 온 수건으로 몸을 덮는다. 편하다. 눈을 감는다. 어제 보았던 독특한 구성의 사진 산문집이 떠오른다. 나도 그런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 작년 여름부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던 '물끄러미'라는 키워드를 이제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끄러미 책의 표지 디자인을 한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왜인지 물끄러미를 떠올리면 유연한 물결이 그려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마치고 눈을 뜨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시던 식혜는 바닥이 보인다. 이제 다시 목욕탕으로 가야겠다.

목욕탕에 들어오니 엄마는 벌써 씻고 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중목욕탕과 친밀한 삶을 살았다. 우리 가족은 주말만 되면 집 앞 목욕탕이나 조금 멀리 있는 찜질방에 가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수록 자주 가진 않지만, 지금도 몸이 찌뿌둥한 날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한다. 고등학생 때도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무조건 목욕 가방을 챙겨 사람이 적은 평일 오후 목욕탕을 차지했다. 각자에게 있는 목욕 루틴은 목욕탕에 오면 조금 더 정성스러워진다. 거의 비슷하지만 가끔 리뉴얼된다. 오늘은 이랬다.

*탕과 찜질방에서 나온 후의 루틴이다

1) 딥 클렌징 샴푸를 머리에 뿌리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다

2) 몸을 한 번 적시고 때를 민다. (다리-팔-배-등 순으로)

*등은 엄마랑 서로 밀어준다

3) 머리를 헹군다

4) 헤어 팩을 바르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다

5) 바디 워시를 칠하고 헹군다

6)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온 수제 팩 (들깨+꿀)을 얼굴과 몸에 바른다

7) 팩이 조금 마를 동안 우리가 앉은자리의 바가지와 의자를 씻고 제자리에 둔다

8) 문 앞 샤워기에서 온몸을 헹군다

9) 미리 챙겨 온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밖으로 나간다

나름 체계적이고 계산적이기까지 한 샤워를 마치고 나면 아주 뿌듯하고 개운하다. 아무튼 오늘은 온천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가고 싶어졌다. 가면 힐링 되고 기분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가령 도서관이라든지 노을 지는 바다라든지.

오늘의 노천탕 기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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