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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Feb 09. 2024

넉넉하게

넉넉하게. 박완서 작가는 우리말 중 ‘넉넉하다’는 표현이 가장 좋다고 한다. 6.25 동란 중 궁핍하게 살던 때, 작가의 어머니는 넉넉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넉넉할 거 하나 없는 형편이지만 넉넉한 얼굴로, 집에 오는 이들을 넉넉하게 대하셨다. 요즘은 모든 것이 정말로 넉넉해졌다. 그러나 자기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게 자기 가진 것을 나누어줄 만큼 넉넉해진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끝까지 짜지 않은 치약, 몇 번 입지 않은 옷, 냉장고 정리를 하다가 궤짝째 쏟아버린 사과가 떠오른다.

마음의 넉넉함이 사라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크고 작은 기도 제목을 적었던 노트를 펼쳐 읽으며 깨달았다. 나에게도 이런 넉넉한 마음이 있었구나. 스쳐 지나가듯 만난 누군가의 기도 제목을 기억하고 적어둔 넉넉함, 일 년에 연락 몇 번 하지 못하는 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던 넉넉함, 아주 먼 타국 땅을 위한 넉넉함, 작은 것들을 위한 넉넉함. 요즘의 나에게서는 넉넉함을 찾기 힘들다. 스스로를 바라보기 바쁘다. 무턱대고 마음의 시선을 나눠줄 수 있던 때가 그립다. 넉넉한 사랑을 가지고 싶다. 오늘도 맛난 거 먹고 사랑하는 사람 보고 따뜻한 집에서 부족함 없는 하루를 보냈다. 부족함도 없지만, 넉넉함도 없는 하루를 보냈다. 넉넉함의 다른 말은 기쁘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인가 보다.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사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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