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시간은 없어요. 언제든 밥 먹으러 오세요.
[오늘의 비행 메뉴]
은박지
빨강
파랑
초록
알 수 없음
세상에 시계가 모조리 사라져 버려도 식사 시간은 분명히 맞춰냈을 테다.
점심시간이 되면 없던 배고픔도 생긴다. 멀리 떨어진 학교 급식소에서 메뉴의 힌트를 냄새로 알려주면 아이들은 종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회사에서 타자기를 타닥타닥 두드리다 보면 꼬리뼈 시곗바늘이 '5분 뒤 점심시간이야!' 하고 알려준다. 비행기가 완전히 이륙한 후 좌석벨트 등이 꺼지면 기내의 승무원 발걸음의 분주한 소리가 '30분 뒤 밥 먹을 시간이야!' 하고 알려준다. 승무원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는 승객들의 설렘과 허기짐을 채워준다. 긴 비행기 안을 걷고 뛰는 승무원의 걸음들이 쌓여 서비스를 끝내고 나면 뱃속 알람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혹여나 승객분들의 잠을 깨우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배를 부여잡고 곧장 기내 안, 승무원 구내식당으로 달려간다.
비행을 갈 때마다 기내식의 메뉴들이 달라지는 것처럼, 승무원의 기내식 또한 비행마다 달라진다. 승객분들이 드실 기내식 메뉴와는 다른 크루들이 먹을 음식들이 비행기에 실린다. 샐러드, 그릭 요거트, 간식거리, 치킨, 볶음밥 등등의 다양한 메뉴들이 실린다. 서비스를 하다 보면 두 가지의 메뉴들 중 하나가 소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서비스가 끝이 나고도 그 메뉴가 없을 경우 크루들 메뉴에서 제공할 때가 있다. 그 메뉴가 없어지면 크루들은 당연히 못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의 천사 같은 승무원들은 승객분들의 행복한 여행이 우선인 셈이다.
승무원 구내식당은 다름 아닌 '갤리'이다. 갤리는 기내 안 서비스를 준비하는 식당의 주방 같은 공간인데, 모든 서비스가 끝나고 나면 크루들이 옹기종기 모여 밥도 함께 먹고 재미있는 담소들도 나누곤 한다. 그러다 콜벨 (승무원을 부를 때 누르는 기내 버튼 )이 울리면 돌아가며 콜벨을 확인하러 간다. 콜벨이 많이 울리는 날에는 밥을 삼키듯이 먹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는 너무 바쁠 때는 식사를 아예 거르는 습관이 생겼다. 오히려 소화불량이 현저히 줄어들어서인지 위염도 피부염도 거의 없어졌다.
서비스가 전부 끝나면 크루들은 배고픈 마음을 한껏 참으며 식사 메뉴를 살피기 시작한다. 다채로운 색깔의 포일로 덮여있는 메뉴들은 뚜껑을 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비행마다 메뉴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 가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방콕 비행에서는 '망고 스티키 라이스'가 실린다. 미국 비행에서는 '딸기 민트 스무디'가 실린다. 어느 나라를 가던지 요거트는 필수로 실리는데, 그 나라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그 나라에서 유명한 요구르트가 제공된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기내 안 글로벌 푸드코트' 인 것 같다.
"오늘은 어떤 메뉴가 있을까?"
"오늘은 한국 비행이니까 김치가 있겠네!"
"호주 요구르트 정말 맛있는데, 오늘 두 개 먹어야겠다!"
지구를 돌면서 그 나라 식료품점에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기내에서도 가끔 맛볼 수 있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20개국이 넘는 사람들과 일 하며 서로의 입맛에 대해 공유하기도 하고, 평생을 다르게 살아왔어도 입맛이 비슷한 게 신기하기도 하다. 다 함께 열심히 일을 한 후에 [오늘의 가장 맛있는 메뉴]를 서로에게 추천해 준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고등학교 수련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더욱 소중하다. 일을 할 때에는 동료에 지나지 않지만, 이렇게 일명 기내 안 구내식당에서 오물오물 밥을 먹으며 웃는 모습들이 참 예뻐 보인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지구를 손에 넣은 사람들이 어쩌면 '다정함' 까지도 손에 넣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 먹을 게 없어 오븐 근처를 서성이면, 본인의 것을 선뜻 내어주는 다정함이 있다.
기내 안 구내식당에는 오늘도 하하 호호 웃음소리와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가득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딸이자 아들인 젊은 친구들의 땀들이 섞인 밥시간이 편할 수 있게 그때만큼은 더더욱 비행기의 기류가 안정적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