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행선지는 과연 어디일까요?: 스케줄에 관해
"눈을 감고 지구본을 힘차게 돌린 후 손가락을 찍으면 나오는 나라에 갈 거야"
"음.. 그런데 그게 태평양 한가운데면?"
" 어쩔 수 없는 거지, 다시 돌릴 거야. 꽝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이야."
꽝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나라가 나올 때까지 지구본을 힘차게 돌리다 보면 결국은 내가 좋아하는 나라를 선택하게 된다. 운수를 다 써버린 날처럼 아무리 지구본을 돌려도 제자리걸음이면 다음날에 다시 돌리면 되는 거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 다음도 안되면 그다음이면 되지. 이런 천진난만한 생각으로 어른이 되었다면 내가 이 직업을 조금은 더 즐길 수 있었을까?
사회는 나의 지구본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다 하도록 두지 않는다. 회사가 지정한 지구본에 회사가 찍어놓은 핀에 가게 되는 것. 그게 현실이다.
승무원은 원하는 비행을 달마다 신청할 수 있다. 이건 회사마다 다르게 운영되는 시스템이겠지만,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원하는 비행을 신청할 수 있게 되어있다. 원하는 곳을 어릴 적 지구본의 손가락 핀처럼 다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그림의 떡이다. 신청한 비행들 중 절반만 받아도 감사한 일이니 말이다. 여태껏 내가 신청한 비행들을 하나라도 받아본 적이 있기는 한가.
나만의 지구본 돌리기를 포기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현실을 인정한 후에는 누군가 돌려준 지구본을 따라 비행을 하는 것에 꽤나 설렘을 느끼게 되었다. 현실 적응 또는 커리어 적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불행이 담겨도 행복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마음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편이다.
나의 5월을 돌아보면 샌프란시스코, 프라하, 싱가포르, 리옹을 간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일정이다. 나의 출퇴근은 매일 그리고 매달 달라진다. 이번 주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음 주는 프라하에서 이런 식으로 지구를 건너 건너 살아간다.
- 퇴근 후 샌프란시스코 인 앤 아웃 버거 먹을까?
- 프라하 도착하면 브런치 먹고 까를교 걸으며 굴뚝빵?
- 다음 날 아침 싱가포르 마리나에서 야외러닝 해야지.
나의 퇴근 10분 전 생각은 이러한 것들이다. 이 생각들의 특별함이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나만의 지구본에 원하는 곳을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결국 이 지구 위 대륙은 변하지 않는다. 나라의 개수도, 내가 소망했던 행선지도 변하지 않는다.
그 시기가 조금 늦어질 수는 있어도 지구를 수만 바퀴쯤 돌고 나면 종국에 나는 원하는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결국, 이 지구본을 손에 넣은 셈이다.
아니, 이 지구를 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