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35
추억 보정이라는 말이 있다. 대단치 않은, 혹은 조금은 싫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 곱씹고 회상하면 괜스레 좋은 감정만 남는 것을 말한다.
중학생 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집에서 출발해 언덕을 하나 넘어야 나오는 곳이었다. 서울에서 산 넘어서 학교를 다녔다고 하면 다들 믿지 않지만, 실제로 내가 다니던 통학로는 이제 지자체에서 등산로로 꾸며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매일 30 ~ 40분 정도를 걸어서 등교를 했고, 학교에 도착하면 땀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성적에 예민했던 어머니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보는 날에는 어머니가 아버지께 애들 차로 학교에 내려다 주고 가라고 부탁을 하셨고, 덕분에 나는 시험기간만큼은 쾌적하게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차는 93년식 세피아였고. 항상 삽입된 CD에서 나오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35 1악장이었다. 아버지는 굳이 트랙을 넘기지 않았고, 처음 출발하면 항상 시작부터 들었기 때문에, 항상 1악장만 들었다. 등산로가 아닌 차로는 언덕을 더 굽이굽이 넘어서 가는 길이었고, 학교에 도착할 때쯤이 되면 1악장의 클라이맥스인 부분이 연주가 되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 부분이 내가 시험장에 등장하는 테마곡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악장의 클라이맥스는 바이올린 독주가 화려한 기교로 켜켜이 감정을 쌓아가다가, 팽팽하기 당긴 활시위를 던지듯 오케스트라에게 쏘듯이 던지면, 그걸 받은 오케스트라가 화려하게 화답하는 멋진 구성이다. 마치 힘들게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광경을 접했을 때와 비슷하다. 내가 해 왔던 것들이 헛되지 않았고, 결국은 이렇게 멋진 결과를 이뤄냈다는 느낌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덧 평범한 아저씨의 삶을 살고 있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이렇다 할 업적도 없이 하루하루 자의 반 타의 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삶을 사는 내게,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여전히, 마치 내가 멋진 결과를 이뤄낸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한다. 언제냐고 물어보면 막상 대답할 것도 없는 그 멋진 순간이, 마치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추억 보정을 넘어 없던 기억을 만들어내는 수준이다.
그 블러핑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이 곡의 아름다운 (이라 말하지만 나 같은 일반인에겐 약간 지루한) 2악장을 지나서 3악장에 도달하면,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는 다시 멋진 대결을 시작한다. 클라이맥스로 향해가면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는 서로 숨 가쁜 대결을 펼치고, 서로 한 번씩 쥐어박으면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한다. 그러다 어느덧, 서로가 서로를 빛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화합하여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내면서 곡이 끝난다.
차이코프스키의 의도 따위는 모른다. 공부해 본 적도 없고 찾아본 바도 없다. 한 없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곡은 항상 나를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데려갔다가, 이내 그런 게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서 어느덧 최고의 마무리를 하게 되는 내 삶을 꿈꾸게 한다. 세월이 흘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래 한 곡 들을 수 있다면 이 곡의 1악장을 들으면서, 잠깐이나마 가장 찬란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괜찮은 삶이었다고 스스로 만족하면서 눈을 감을 수 있는, 그런 보람찬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준다.
이 브런치북에서 소개하는 곡들은, 내가 지금껏 천 번은 더 들은 곡들을 선정해서 소개하는 것이지만, 그중에도 이 곡은 내가 가장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곡이라서 꼭 처음에 소개하고 싶었다. 물론 이 곡은 너무나도 유명한 곡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작품의 이름을 세세히 외울 필요도 없거나와, 이 한 곡으로 차이코프스키는 소위 말하는 세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에 이름을 올리면서, 교과서적으로도 접할 수밖에 없는 익숙한 곡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2악장과 3악장의 멋진 구성까지도 모두 들어본다면, 여러분에게도 멋진 추억 보정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폰 카라얀 지휘, 안네 소피 무터의 바이올린 연주,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함께 한 녹음을 가장 좋아한다. 1악장의 테마 부분에서 카라얀의 멋진 지휘가, 오케스트라의 찬란함을 배가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린 여제인 안네 소피 무터의 젊은 시절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녹음 버전을 링크로 걸어놓기로 결정했다. 여유 있게 감상하셨으면 좋겠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안네 소피 무터,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88
https://www.youtube.com/watch?v=_Wd8z7Ovsyk
[사족]
이 곡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있다. Le Concert라는 2009년 프랑스 영화와, Together(和你在一起)라는 2002년 중국 영화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데, 두 영화 모두 곡이 연주되기 전 까지는 썩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다가, 클라이맥스에서 곡이 연주되는 순간부터, 마치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Le Concert는 1,3악장을 연주하고, Together는 3악장을 연주하는데, 굳이 한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Together가 더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밑도 끝도 없는 사랑을 깨달은 아들이 뛰어가서 아빠를 붙잡고 하는 연주는, 영화가 어쨌든지 관계없이 엄청난 감동을 준다. 정말 구하기 힘든 영화라서, 시네포커스에서 리뷰한 영상의 링크만 걸어놓고 마무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eSyiDkXvx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