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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an 30. 2024

삶에 지쳐 열정을 잃은 것 같을 때

베토벤 소나타 23번, '열정' 3악장

 10살까지 상가주택에 세를 들어 살았다. 맨 위층이 주인집인 전형적인 구조였는데, 주인집에는 음대 입시를 준비하는 누나가 있었다. 피아노를 치면 항상 소리가 들렸는데, 당시에는 층간소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음악 감상 시간이었다.


 그 누나가 고3이 되고 나서는, 입시곡이 정해진 것인지 한 곡만 계속 치기 시작했는데, 바로 베토벤 소나타 23번, 소위 '열정' 소나타라고 불리는 곡의 3악장이었다. 거의 매일 들었음에도 질리지 않았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중간중간 그 누나가 틀리면서 연주가 멈추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는 그 곡을 들을 수 있는 CD도, 플레이어도 없던 터라, 연주가 멈추면 더 듣고 싶어도 별 수 없이 다음날을 기약해야 했다. 이후 그 누나는 이화여대에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다. 입학한 후로는 더 이상 집에서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고, 우리 집도 지하철 몇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렇게 '열정' 소나타와는 몇 년간 이별하게 되었다.

  



 15살이 되어서, 동네에서 꽤 잘 사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1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큰 크기의 스피커가 있는 컴포넌트가 있었고, 한쪽 벽에는 클래식 음악 CD가 진열되어 있는 멋진 집이었다. 친구들과 '세가 새턴'이라는 콘솔 게임기로 게임을 하면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 베토벤 열정 소나타가 있는 CD를 발견했고, 친구에게 들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CD를 넣고 3악장을 재생하자마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열정 소나타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피커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친구에게 게임 차례를 양보했다.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곡을 다 듣는 것은 게임 몇 판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스트리밍 기기와 플랫폼이 널렸고, 궁금하면 언제든 스마트폰을 두들기면 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휴대용 CD 플레이어나 MP3 플레이어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쓰는 것이었고, CD를 사는 것은 더 호화로운 사치였다. 나는 이렇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날 집에 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그 곡을 들었다. 그리고 CD 재킷에 쓰여 있는 글자를 외우려고 노력했다. Vladimir Ashkenazy. 14살에야 알파벳을 깨우친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글자였고, 적어가는 것은 왠지 부끄러웠다. 어떻게든 눈에 익히려고 계속 쳐다보면서 음악을 들었다.


 대학교 근처에는 당시 오프라인 레코드 판매점 중 가장 유명했던, 지금은 없어진 신나라 레코드가 있었다. 술이나 PC방 약속이 없는 날에는, 신나라 레코드에 들어가서 구경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클래식 코너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그려진 CD 재킷을 본 순간, 15살 중학생의 기억이 영화처럼 밀려왔다. 이제는 잘 읽을 수 있게 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 앨범이었다. 친구집에서 만난 그 CD는 아니었지만, 구매를 해서 컴퓨터에 넣고 이어폰을 끼고 몇 번이나 돌려 들었다. 3악장, 3악장, 3악장. 이제는 마음껏 들을 수 있음에도, 마치 오늘 아니면 못 듣게 될 사람처럼 계속 들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해보자. 베토벤은 '열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적이 없다. 곡에 붙어있는 부제를 작곡가가 스스로 붙인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평론가들이 후세에 붙이는 경우가 배부분이다. 하지만 곡의 느낌을 잘 살려 붙인 부제 덕분에, 우리는 어떠한 곡을 기억할 때 '베토벤 소나타 23번 F단조 작품번호 57'이라고 외우는 대신, '열정 소나타'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간단하게 서양 음악사의 기조를 살펴보자.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바로크 → 고전파 → 낭만파 → 국민악파 정도로 알고 있으면 교양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베토벤은 고전파의 음악적 완성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그 이후 세대의 음악가들이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가 발달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낭만파라는 칭호를 듣기도 한다.


 베토벤은 알려진 바와 같이, 20대 후반부터 청력을 잃어갔다. 청력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고뇌와 사색, 독서 등은 베토벤의 창작 능력을 폭발시켰는데, '열정' 소나타도 이때 작업한 곡이다. 비엔나 고전파의 엄격한 형식이 느껴지면서도, 안에서 작렬하는 광기가 느껴지는 것에는 이러한 개인적 배경이 있다. 후세의 평론가들은, 요제피네와 테레제라는 (심지어 자매인) 두 여성을 동시에 좋아하면서 마음속의 격정적인 부분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폭발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의 고뇌가 느껴졌다. 이 곡의 빠르기는 Allegro ma non troppo,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이다. 곡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달려 나가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절제된 템포와 형식을 유지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것을 계속 꾹꾹 눌러 담아가면서 쌓아간 감정은, 고전적 형식의 반복과 함께 증폭된다.


 그렇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쌓인 감정이 코다(Coda, 이탈리아어로 '꼬리'라는 뜻이며, 곡의 마지막 부분을 뜻함)Presto(매우 빠르게) 지시와 함께 폭발하게 되면서, 듣는 사람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 코다는 너무나 많은 음표를 너무나 빠르게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미스터치가 없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지만, 그만큼 연주자의 능력에 따라 엄청난 표현과 감정전달이 가능한 영역이기도 하다. 굉장히 화려한 기교가 필요하기 때문에, 언뜻 들으면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등 낭만파의 음악 같기도 하지만, 이 곡은 폭발하는 감정에도 그 형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 이게 이 곡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계획한 하루를 사는 날은 많지 않다. 출근해야 하니까 일어나고, 근무시간 동안 일 하고, 퇴근해서 저녁밥 차리고 아기랑 놀다가 재우고, 어질러진 집 정리하고 분리수거하고 씻으면 내일 출근을 위해 자야 한다.

 

 살아지는 날들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왠지 모를 답답함도 쌓여간다. 있지도 않은 꿈이 있었던 것 같고, 열심히 살 기회가 있었을 때는 게을렀으면서, 이제 와서 나를 둘러싼 현실적 여건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 그럴만해서 놓친 기회와 선택들을 아쉬워하면서, 열정 없이 살아가는 스스로가 불쌍하고 부끄러워진다.


 다시 달려보고 싶을 때, 한 번도 그런 적 없지만 왠지 다시 열심히 살아보고 싶을 때, 아직 꺼지지 않은 가슴속의 불씨를 되살려 업화를 끌어내고 싶다면, '열정' 소나타 3악장을 들어보길 추천한다. 이젠 그냥 살아지는 것 같은 삶의 무기력함 속에도 실낱같은 열정이 남아있다면, 이 음악과 함께 다시 불태워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이제 더 이상 그럴 여력이 없다 해도, 이 곡의 코다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 그런 열정적인 삶의 경험을 대리만족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쉬케나지의 열정 3악장, 그리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임동혁 피아니스트의 1 ~ 3악장 전체 연주 영상을 링크한다.



[베토벤 소나타 23번, ‘열정’ 3악장, V.아쉬케나지]

https://youtu.be/trQOwRqFSmM?si=xDEe5b1EkmYcqedU


[베토벤 소나타 23번, ‘열정’ 전체 연주, 임동혁]

https://youtu.be/7iNMybSsts4?si=1gyPSOK64FPq3S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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