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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화 Oct 25. 2024

백수에게도 루틴은 있답니다

불편함이 무뎌지기까지

나는 서울에 온 지 이틀째부터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면대 수도꼭지의 위치부터, 잘 닫히지 않는 옷장 하며 책상 높이에 비해 낮은 의자, 푹신하지도 않으면서 삐걱되기까지 하는 좁은 침대. 그리고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던, 환기 기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창문까지. 그동안 내가 살아온 환경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이 불편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울에 온 지 두 달 후 본가에 잠깐 내려갔을 때 어찌 된 일인지 오히려 거기가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십오 년을 넘게 산 그 집이 고작 두 달 된 새 보금자리보다 더 낯설게 느껴질 줄이야.        

   

백수에게도 루틴은 있답니다

이렇듯 새로운 보금자리에 익숙해지며 나름의 루틴도 생겨났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씻고 TV를 보며 샐러드 같은 간단한 아침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대본집을 보거나 아니면 드라마를 보며 공부한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며 예능 오락프로를 잠시 보다가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다시 이런저런 을 읽는다. 저녁도 별다를 게 없다. 저녁을 먹은 뒤 한 시간 정도 동네를 산책하다가 마트에 가 다음날 먹을거리를 사 온다. 집에 오면 씻고 커피를 마시면서 TV나 유튜브를 보며 잠시 쉬다가 다시 글을 쓰거나 글을 읽거나 드라마를 본다.



어찌 보면 정말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의 루틴이지만 이 단조로운 루틴이 만들어지기까지 방황도 있었다. 처음 서울에 와 관광객 모드를 즐겨보겠다며 매일 같이 나가 만 보 이상 걷고 저녁 늦게 들어오니 피곤해서 글을 쓸 시간도 공부할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피곤해서 집에 있는 날이면 늦게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TV랑 유튜브만 보며 하루를 그냥 흘려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태해지면 안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와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들로 나의 루틴을 만들었다.     



낙타야 바늘구멍을 통과해 보렴

작법 수업을 듣게 되면서부터 이제 예전처럼 드라마를 단순히 오락용으로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주인공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개연성을 따져보고 떡밥 회수를 점쳐보기도 하는 등 드라마를 분석하며 공부했다. 아. 이거. 진짜 보통 일이 아니네. 이것이 요즘 드라마를 보며 내가 느낀 점이다. 짧게는 8부에서 길게는 14부, 16부나 되는 긴 서사의 방대한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서 작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 공부하고 연구하며 머리를 쥐어짰을까?      


예전에는 드라마를 본 시청 소감 이래 봐야 재미없다. 재미있다. 이 두 가지 표현이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드라마를 보고 나서 재미 여부를 떠나 많은 복합적인 생각이 든다. 그동안 수많은 드라마를 보며 내공이 쌓이고 보는 눈이 높아진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할 능력이 있는가. 그 이전에, 나에게 그런 일이 주어지는 게 현실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      


꿈은 이상이고 멀리 있기에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일은 현실이고 직접적이기에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 꿈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다. 아직은 너무 멀어 닿을 수도 없는 곳에 있는 그 꿈에.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꿈이라 칭할 만큼 비현실적인 일이 어느 누군가에겐 매일 같이 벌어지는 현실이다. 그 현실이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나?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는 상상을 하며 행복회로를 돌린다. 이렇게라도 해야 암울한 미래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으니까. 그래야 지금을 버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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