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법 수업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과제로 제출할 단막에 쓸 소재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저런 소재들이 떠올랐고 그 소재들 중에서 70분 안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를 추려 나갔다.
너무 뻔해도 안되고, 너무 자극적이기만 해도 안되고, 너무 지루해도 안되고,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내 나름대로의 기준에 맞춰 소재를 추려 나가기를 여러 번, 드디어 단막에 쓸 소재를 정했다. 완벽한 소재라고는 볼 수 없지만 시의성도 가지고 있고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내 방식대로 색다르게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사실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소재를 정했으니 이제 결말을 정해야 했다. 사람마다 이야기를 짜는 방법이 각양각색이지만 나는 소재를 정했으면 결말을 먼저 떠올려본다. 그랬을 때 결말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이야기는 일단 쓰지 않는다. 가끔 결말을 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나는 무조건 결말이 있어야 이야기를 쓸 수 있다. 물론 스토리가 진행되는 도중에 결말이 바뀔 수는 있을지언정 결말도 정하지 않고 글을 쓰는 건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이면 내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편이다. 다행히 내가 쓰고자 하는 소재에 대한 결말은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소시오패스가 되어라?
소재와 결말까지 정해졌으면 이제 대략적인 플롯을 짜야한다. 어떤 갈등이 좋을까? 드라마 작가는 어떻게든 최대한 주인공을 위험에 빠트리고 못살게 굴어야 한다는데 이거 막상 해보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내가 만든 가상의 세계이지만 어떤 갈등과 시련을 줘야 주인공이 더 힘들어할까를 고민하다 보니 내가 마치 소시오패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잘 되길 응원하면서도 아무 고난과 갈등도 없이 꿀만 빠는 주인공의 인생에는 흥미가 전혀 없다. 이건 대체 무슨 심리란 말인가. 주인공이 고난을 딛고 일어서길 바라지만 고난 없는 주인공은 또 싫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작가는 시청자가 원하는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든 주인공을 괴롭히고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며 병 주고 약 주고를 반복해야 한다. 드라마를 봐라. 맨날 불나고, 차 사고 나고, 폭탄이 터지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고 하다못해 뺨이라도 맞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인생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들이 주인공에게는 수시로 일어난다. 그렇게 작가는 한시도 주인공을 편하게 가만두지 않는다.
이렇듯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에게는 끊임없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게 갈등이거나 위기인 경우가 많다. 작가는 주인공이 갈등과 위기를 겪게 만드는 와중에도 개연성과 핍진성, 당위성 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허구라고는 하나 너무 억지스럽고 납득이 가지 않는 갈등과 위기는 시청자로부터 외면받기 때문이다. 그래. 말은 쉽지. 이해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다 고려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다.
나는 신도 아니면서 주인공에게 자아를 부여함은 물론이고 어떤 병을 줄지 어떤 약을 줄 지까지 고민해야 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카페에서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뜨거워진 머리를 식힌 뒤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짰다. 그리고 다음날 시놉을 다듬으며 좀 더 구체적인 시놉으로 발전시켰고 그다음 날부터는 보다 상세한 줄거리가 적힌 트리트먼트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트리트먼트에 살을 좀 더 붙이고 수정하며 최종 트리트먼트를 완성했다. 소재를 찾고 시놉과 트리트먼트를 완성하기까지 대략 2-3일 정도 걸린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트리트먼트를 토대로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딱 35페이지만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