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보다 먼저 채워진 것
나는 김밥을 좋아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김밥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늘 따로 있다. 사람들이 은근히 피하거나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그 부분, 바로 김밥의 꼬다리다. 사실 '꼬다리' 라는 표현은 표준어가 아니다. '꼬투리' 라고 적어야 올바른 표준어이지만 글의 분위기를 조금 더 살리고자 일부러 이렇게 표현했다.
대부분의 김밥은 일정한 규격을 유지한다. 김 위에 밥을 펴고 재료를 가지런히 올린 다음, 일정한 힘으로 말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김밥은 거의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으로 잘려 나온다. 하지만 꼬다리는 다르다. 김밥말이가 끝나는 지점, 정리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마지막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꼬다리는 늘 조금씩 다르다.
보통 꼬다리는 다른 김밥 조각보다 큰 경우가 많다. 김밥을 썰다 보면 마지막 한 조각은 괜히 아깝다는 마음이 들고, 그래서 한 번 더 욕심을 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꼬다리는 유난히 두툼해진다. 한 개를 먹었을 뿐인데 묘하게 두 개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게다가 꼬다리는 속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 햄이 삐져나오고 단무지가 옆으로 밀리고 오이가 제자리를 벗어나 있다. 어떤 날은 계란이 유난히 많고, 어떤 날은 햄이 과하게 몰려 있다. 형태는 엉성하지만 양만큼은 확실하다. 말하자면 꼬다리는 김밥 세계의 가성비 담당이다.
그래서 나는 꼬다리를 좋아한다. 보기에는 예쁘지 않을지 몰라도 실속은 누구보다 탄탄하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할 만한 외모는 아니지만 막상 먹어보면 만족도가 높다. 괜히 사람들이 꼬다리를 두고 “마지막이라 아쉽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은근히 탐이 나지만, 괜히 체면상 양보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꼬다리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김밥은 단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양이 흐트러진 음식을 먹는 게 불편한 사람에게 꼬다리는 매력적이지 않다. 끝이 지저분해 보이고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린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꼬다리는 종종 남겨진다. 접시 위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집어 들리거나, 아예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치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꼬다리는 단 한 번도 자기 역할을 포기한 적이 없다. 김밥이라는 이름 아래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고, 똑같은 밥과 김을 품고 있다. 다만 자리가 끝이었을 뿐이고, 정리가 덜 되었을 뿐이며, 모양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다리는 분명 누군가에게 선택된다. 나처럼 꼬다리를 일부러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남들이 손대지 않아서 오히려 더 마음 편하게 집어 드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애매한 존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장 기다려지는 한 조각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양이 아니다. 어디에 놓였는지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겉모습으로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한다. 단정하지 않으면 부족하다고 여기고, 눈에 띄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중심에 서지 못하면 끝에 밀려났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하찮게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꼬다리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끝에 있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모양이 흐트러졌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불완전함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쓸모란 무엇일까.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전부에게 선택받지 않아도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아봐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밥 꼬다리는 오늘도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킨다. 누군가의 취향이 되어주고, 누군가에게는 작은 만족을 안겨준다. 겉모습은 조금 어수선할지 몰라도 속은 누구보다 꽉 차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망설임 없이 꼬다리를 집어 든다. 가장 마지막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먼저 선택되는 기쁨을 아는 사람으로서. 모양이 어떻든 간에 내실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틀림없이 누군가는 그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쓸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