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신의 한 수.
이 표현은 바둑에서 나왔다. 단 한 수로 판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결정적인 선택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두가 불리하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기적처럼 형세를 뒤집거나, 이미 끝났다고 여긴 판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수.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도 종종 이 말을 빌려 쓴다. 인생을 바꾼 결정, 흐름을 뒤집은 선택 앞에서 말이다.
바둑을 보다 보면 그런 장면이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죽었다고 여겼던 집이 다시 살아나고, 단단히 버티고 있던 집이 한 돌의 침투로 와장창 무너져 내린다. 조금 전까지 완벽해 보이던 판이 한 수로 흔들리고,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던 국면에서 뜻밖의 길이 열린다. 바둑은 늘 그렇게 말없이 보여준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다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래서 흔히 우리는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그 말이 조금 과장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작은 판 위에서 설명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둑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한 판의 흐름을 끝까지 지켜보다 보면 그 말이 왜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바둑판은 19줄과 19줄로 이루어져 있다. 고작 361개의 점이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공간 안에서 흑과 백은 서로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그 작은 판 위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공격과 수비, 욕심과 절제, 판단과 후회가 동시에 오간다. 한 수를 두기까지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 경우의 수가 스쳐 지나가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나머지는 모두 포기해야 한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늘 선택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 길을 택하면 저 길은 갈 수 없고, 지금 멈추면 다음 기회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어떤 수를 둔다. 그때마다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그 순간의 최선을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다. 바둑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는 순간에는 최선이라 여겼던 수가 몇 수 뒤에 와서 실수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둑에는 형세 판단이라는 개념이 있다. 지금 판이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능력이다. 감정에 휘둘리면 판을 그르치기 쉽다. 조금 불리하다고 해서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면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본다. 반대로 유리하다고 방심하면 작은 빈틈 하나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고수일수록 조심스럽다. 이기고 있을 때 더 차분해지고, 지고 있을 때일수록 더 침착해진다.
이 모습은 인생과도 닮아 있다. 일이 잘 풀릴 때 사람은 쉽게 오만해지고, 상황이 나쁠 때는 조급해진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감정의 흔들림을 가차 없이 시험한다. 바둑판 위의 돌처럼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야 할 때가 많다. 화려한 수보다 중요한 건, 무너지지 않는 한 수일지도 모른다.
바둑을 보다 보면 일부러 손해를 감수하는 수를 두는 장면도 자주 마주한다. 당장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더 큰 흐름을 위해 필요한 포기다. 한 집을 버리는 대신 판 전체를 살리는 선택.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지만, 나중에 가서 보면 그 수가 없었다면 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당장의 이익을 내려놓아야 할 때, 지금의 안정을 포기해야 할 때. 그 선택은 늘 어렵고,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 포기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바둑은 그런 선택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조용히 보여준다.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바둑에는 완벽한 판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잘 둔 판에도 실수는 있고, 아무리 불리한 판에도 기회는 남아 있다. 마지막 돌이 놓이기 전까지 결과를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둑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쉽게 평가한다. 성공과 실패라는 말로 빠르게 결론을 내려버린다. 하지만 바둑판 위에서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판이라면 그 평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마지막 수를 두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361개의 점 위에서 이토록 많은 사건과 사고가 벌어진다. 그렇다면 바둑판보다 우주만큼 더 넓은 우리의 인생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변수와 가능성이 존재할까. 우리가 흔들리고, 헤매고, 확신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부르는 말이 좋다. 인생을 단순화하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지를 인정하는 표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수에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고,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끝나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수를 두느냐,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오늘도 누군가는 바둑판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돌 하나를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 살아가며 내리는 수많은 선택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