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넘기다 멈춘 날

by 풍운

그날은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기념일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축하를 받을 날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달력 한쪽에 적혀 있는 평범한 숫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손끝이 그 날짜에서 멈추었습니다. 종이를 넘기려다 말고, 한참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무 일 없는 날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그날 이후로 시간이 다르게 흘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말합니다. 달력이 몇 장 더 넘어가면, 계절이 한 번쯤 더 바뀌면, 마음도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달력은 성실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음 장을 보여줍니다.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그 흐름을 거부합니다. 종이는 넘어가도 마음은 그 자리에 남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날짜를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숫자가 아니라, 온도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병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던 희미한 빛, 복도에서 들리던 낮은 발소리, 어색하게 멈춰 있던 대화의 공기. 그날은 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을 자고 눈을 떠도, 그 하루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달력에는 동그라미를 치지 않았습니다. 표시를 해두면 더 또렷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지운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일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모른 척했습니다. 다른 날들과 같은 얼굴을 한 채, 그 날짜를 넘기지 못한 채로 몇 번이나 다시 들춰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정확한 날짜를 묻습니다. “언제였어?”라는 질문 앞에서 저는 잠시 멈춥니다. 말하는 순간 그날이 다시 현재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 숫자 안에는 마지막 인사와, 제대로 전하지 못한 말과,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공평하다고들 합니다. 모두에게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일 년은 같은 길이로 흘러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상실 이후의 시간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떤 하루는 유난히 길고, 어떤 달은 비어 있는 듯 짧습니다. 특히 그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은 며칠 전부터 서서히 조용해집니다. 이유 없이 예민해지고, 괜히 창밖을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한동안 달력을 빨리 넘겼습니다. 그날을 건너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넘겨도 결국 그 날짜는 돌아왔습니다. 피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맞닥뜨리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피하는 것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루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그래서 어느 해부터는 달력을 넘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괜히 약속을 잡지 않았고, 일부러 바쁘게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 하루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슬픔이 오면 오게 두고, 기억이 떠오르면 막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여전히 아팠지만, 적어도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날짜는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멈칫하게 만들지만, 완전히 저를 붙잡아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날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날만으로 저를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다른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 안에서 웃는 순간도 생겨났습니다.

달력을 넘긴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그렇지만 잊지는 않는 일입니다. 종이는 얇고 가볍지만, 그 위에 적힌 하루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멈춥니다. 숫자 하나 앞에서, 손끝이 떨리듯이 말입니다.

혹시 당신에게도 그런 날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표식도 없지만,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날짜.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하루지만, 당신에게는 아직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날 말입니다.

달력을 넘기다 멈춘 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언젠가부터는, 그 날을 지나 다시 오늘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완전히 괜찮아져서가 아니라, 그 날짜를 품은 채로 살아가는 법을 조금은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도 몇 번쯤 더, 달력을 넘기다 멈출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조심스럽게 달력을 한 장 넘깁니다. 완전히 놓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멈춰 서 있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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