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산에 오르곤 했는데, 어느 날 수락산에서 119를 부른 기억이 있다.
수락산은 중간중간 암반 구간이 많아 오르기도, 특히 내리막길은 더 험하다. 그날도 산을 내려오던 중이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젖은 암석은 금세 미끄러워졌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조심조심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형이 발을 헛디뎠고,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려 했다. 엄마가 반사적으로 형을 붙잡았다. 형은 간신히 자세를 회복했지만, 엄마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돌부리에 넘어진 채 발목을 심하게 다쳤다.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고, 아빠는 허둥대며 119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근처 절로 맡겨져 구조대를 기다렸다. 절에서는 오렌지 주스를 건네주며 기다리라 했지만,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한 채 불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19가 도착해 엄마를 들것에 옮기는 순간, 엄마가 내지른 짧고 강한 비명. 그 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남아 있다.
언젠가부터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라산을 오른 적이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제주의 전경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탁 트였고, 구름과 거의 닿을 듯한 그 고도에서 맞은 바람은 특별했다. 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 먹은 김밥은 지금껏 먹은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요즘은 종종 관악산에 오른다. 계곡 물에 손과 얼굴을 씻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산에 드는 일은 이제 내게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다.
산을 오르는 건 '쉼'을 위한 선택이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정보들, 스마트폰 속 끝없는 자극들, 일하며 얻는 긴장감과 반복되는 피로 속에서, 가만히 멈추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역설적으로 등산으로 하며 몸을 쓰고.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르기만 해야 하는 그 단순함 속에서 비로소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쉼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나 그 자체에 집중하는 순간이 아닐까. 외부의 불필요한 것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고요함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인왕산 중턱에 자리한 ‘인왕산 숲 속 쉼터’는
과거 군사시설로 쓰였던 공간을 개조해 만든 공공 도서관이다. 김신조 사건 이후 생긴 군 경계시설을, 지금은 시민을 위한 쉼터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목조로 지어진 건물은 산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밝은 나무 마감 덕분에 내부는 따뜻하고 아늑하다. 구조는 단정하면서도 짜임새 있고, 현대적인 한옥 느낌도 난다. 세 면 전체가 통창으로 되어 있어,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들면 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산 중턱에서 '멈춰서 쉬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산을 오른 후,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책을 읽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는 일은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 나를 자극하지 않는 조용한 공간 안에서 비로소 내 마음이 스스로 정리되는 것을 느낀다.
과거의 경계가 오늘의 쉼터로 바뀌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누군가를 막기 위한 공간이, 누군가를 쉬게 하는 공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 특별한 의미를 담는 듯했다.
인왕산 근처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요즘 서울 곳곳에 이처럼 품질 좋은 공공건축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에 이런 장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장소: 인왕산 숲 속 쉼터
주소: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산4-36
건축가: 솔토지빈 건축사사무소 조남호 건축가
- 누구든 무료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합니다.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공간의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