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며칠 전에 되게 우울했거든요.
그러고 며칠 지나니 그날이 오더라고요."
친한 지인과 대화하다 이런 게 많은 이들에게 반복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자에겐 그런 날이 있고 주기적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호르몬 때문임을 잘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다. 별다른 것 없는 날인데 몸이 축 처지고 활력도 조금 떨어지는 그런 날. 작든 크든 이루고자 하는 바에 대한 투지도 조금 옅어지는 그런 날. 어떤 이는 예외 없이 찾아오는 이런 회색빛 날을 본래의 자신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투지도 열정도 기쁨도 에너지도 사그라드는 그 며칠이 잊을만하면 찾아오니 그게 기본값인 줄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다시피 기본값은 자신이 설정하는 것이다. 휴대폰 화면 밝기만 해도 한번 설정해 놓으면 주변 밝기에 따라 조절되는데, 기본값을 조금 밝게 설정하면 더 밝아지고, 조금 어둡게 설정하면 밝기를 올려도 덜 밝아진다. 그럼 그날에 대비한 기본값은 어떻게 설정하면 좋을까.
그런 날이 아닌 대부분의 나머지 날이 그 기본값을 좌우한다고 믿는데, 거기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몸으로도 경험한 바, 그 기본값을 만드는 대부분의 날에 취한 리추얼이 그 열쇠라 생각한다. 그런 날이 아닌 대부분의 일상에서 쌓아둔 리추얼이 내 몸, 감정, 힘의 기본값이 되어주는 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함으로 피어난 역사적 인물, 동시대를 살아간 탁월성을 증명한 인물들의 리추얼, 일상, 습관, 태도를 배워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가 된 지 오래다. 그들을 그들이게 한 많은 습관들을 분석하다 보면 공통된 특성이 많음을 알게 된다. 시중에는 그런 책, 영상이 넘쳐나는데, 누구나 의지만 있다면 읽고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취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아침 리추얼 : 충분한 수면(7시간 정도) 후 기상 > 기지개, 스트레칭 > 10분간 아침 명상 > 잠자리 정리 > 물 한 컵 > 오늘 계획 적기(우선순위 1개 적고, 나머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간단명료히 기록) > 감사 일기(나, 타인, 물질, 경험에 대한 감사할 것 각 하나씩) > 커피, 독서
2. 그날의 중요한 업무나 주의 집중이 필요한 일은 오전 중에 끝내기
3. 주의력이 떨어지는 4시 이후 30분 이상 운동(어떤 날은 러닝 같은 숨찰 정도의 운동, 어떤 날은 요가 같은 장력 운동)
4. 설거지 등 단순 집안일을 할 때에는 좋은 메시지를 주는 영상을 보며 다 보고 나서 머릿속으로 요약
5. 잠들기 30분 전 명상(초월명상, 잠재의식을 위한 긍정 확언 및 시각화, 호흡명상 중 그날 원하는 것으로)
더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로도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 온 것들이라 좋아하는 이들에겐 같이 하자고 권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지켜내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무엇보다 잠들기 전에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예전과 달리 잠은 충분히 자려고 오히려 더 애쓴다. 최근 들어 충분한 잠의 중요성에 대해 신뢰 가는 연구결과들을 많이 읽고 접하게 되어서다. 가장 섬뜩했던 것은 4시간 잤다 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노년이 알츠하이머로 끝났다는 이야기. 특히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충분한 잠을 잘 때 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매우 쉽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 과학적 사실 역시 큰 자극이 되었다. 7시간 이상 푹 자야 뇌 속 아교 세포가 수축하고, 뇌에선 뇌척수액을 끌어올려 낮 동안 쌓인 뇌 속 노폐물을 씻어준다는 설명이 가장 흥미로웠다. 그러니 이제 미라클 모닝 말고 미라클 슬립 하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예전엔 그런 날이 오기만 하면(보통은 생리 전 날 혹은 첫날) 그런 나의 나약함에 질리곤 했다. 그걸 나약함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기본값을 조금씩 올리고 나니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다음 시작을 위해 준비하는, 쉼의 기간이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에도 주말이 있고 하루 중에도 휴식이 있듯이 내 몸에도 그러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조금 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에너지를 비축하고, 더 큰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몸을 잠시 웅크리는 그 소중한 시간을 말이다.
나는 이제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 날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가만히 내 감정을 응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어 왔구나, 하며 기꺼이 반겨 주자. 불청객이라며 미워하지 말고, 다음의 나의 피어남을 위한 더 소중한 기회라고 여겨야 한다. 조금 더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시간이어야 한다. 부지런한 천성을 지닌 이라면 그런 날엔 게을러지자. 흐름이 끊기는 것이 아닌 다음 흐름을 더욱 부드럽고도 강인하게 하는 것임을 인식하자. 건강한 욕심이라 해도 그런 날엔 조금 내려놓는 게 좋다. 계획적인 성향 역시 조금 즉흥적으로 흐르게 하여도 좋고, 반대여도 좋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쨌든 핵심은 평소에 나라면 안 하던, 조금 자제해 오던 것들을 마음껏 하게 두는 것이다. 안 자던 낮잠을 자도 좋고 잠시 자극적인 음식을 먹거나 폭식을 해도 무슨 큰 문제겠는가. 그런 날의 리추얼은 '리추얼 없음'이라 부르고 싶다.
고유함으로 피어나는 일은 자신이 가진 최대의 장점과 잠재력을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꽃 피우는 것이며 이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다. 그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즐기고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다. 리추얼은 그 길을 위한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임을 기억하려고 적어 본다. 어느 날 잠시 웅크리는 이에게 작은 위로가 될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실은 어느 한구석에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 마음에게 건네는 편지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